‘예산 다이어트’ 과녁된 정부R&D…‘성장동력’ 위축된다[2024예산안]
1991년 이후 첫 감소 기록
당장 먹거리 연구에 예산 집중
2027년에 현재 예산 회복
내년도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올해보다 16.6%나 줄어들게 생겼다. 1991년 이후 정부 R&D 예산이 줄어든 건 처음인 데다, 감소 폭도 이례적으로 크다. 특히 예산을 주로 눈에 보이는 ‘첨단분야’에 투입하면서 당장 성과를 드러내기 힘든 ‘기초연구’나 ‘인재 육성’이 타격받을 가능성이 커 국가 미래성장동력을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내년 정부 총지출이 2.8%에 늘어나는 것을 감안하면 R&D 분야만 유독 허리띠를 졸라매는 형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카르텔’로 지목한 R&D 분야가 정부의 긴축 재정 실현을 위한 희생양이 된 셈이다.
기획재정부가 29일 내놓은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정부 R&D 예산의 감소 폭이 전례가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난 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13.9%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렇게 줄어든 주요 R&D 예산안에 기재부가 이공계 대학 지원 등에 쓰는 일반 R&D 예산안이 합쳐지자 감소율이 16.6%로 더 커졌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안에서 정부 R&D 분야는 총 25조9000억원으로 정해져 올해(31조1000억원)보다 5조2000억원 감소했다. 내년 정부 총지출은 올해보다 2.8% 늘어날 예정이다.
당장 먹거리에 집중 투자
16.6%라는 내년 R&D 예산 감소율은 다른 예산 항목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적시된 12개 예산 항목 가운데 내년에 규모가 줄어드는 건 교육(-6.9%)과 일반·지방행정(-0.8%)뿐인데, 그나마 감소율도 R&D 분야보다는 비교적 적다.
정부 R&D 예산이 줄어든 건 1991년 이후 처음이다. 주요 R&D 예산안에 한정하면 2016년에 한 번 줄었지만, 당시에도 정부 예산안 기준으로 감소율은 2%대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줄어든 내년 정부 R&D 예산은 첨단 분야에 집중 투입된다. 당장 국가 경제의 먹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분야다. 바이오 분야에 1조9000억원, 우주 분야에 6000억원이 투입되고, 반도체와 2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초격차 프로젝트 기술’ 분야에 1조6000억원이 들어간다.
반면 R&D 예산에서 기초연구(-6.2%), 정부출연연구기관(-10.8%) 관련 예산은 줄어든다. 특히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예산이 늘었던 소재·부품·장비, 2020년 코로나 19 확산으로 덩치가 커진 감염병 관련 예산이 주요 조정 대상이 된다.
정부 R&D 예산이 올해와 같은 31조원대로 회복되는 건 3년 뒤인 2027년이다. 이 기간 연평균 R&D 예산 증가율은 0.7%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정부 총지출 증가율이 3.6%인 것에 비해선 한참 적은 수치다.
‘연구’ 기능 훼손 우려
R&D 예산 축소는 지난 6월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데에서 출발한다. 이 발언 이후 여권에선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예산 삭감이 현실화하면 연구 활동에 지장이 클 것”이라며 “연구는 (기술을 개발한 뒤) 실용화를 가늠하는 실증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을 조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토로했다. 실증단계에선 소규모 생산시설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기술이 실험실에 머물 때보다 돈이 많이 든다.
이 관계자는 “내년 정부출연연구기관 전체 예산은 10% 정도 줄었지만, R&D 분야에 한정해 살펴보면 감소폭은 20~30%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인건비와 경상비 예산이 유지되는 대신 R&D 예산 감소 폭이 커졌다는 얘기다. ‘연구’라는 출연연 본래 기능이 훼손될 처지가 됐다는 뜻이다.
신명호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정책위원장은 “정부가 줄어든 R&D 예산을 AI나 우주 분야 등 응용기술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하지만, 기초연구 투자가 줄어들면 제대로 된 응용기술이 나오기 어렵다”며 “기초연구는 ‘기본기’를 키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 정책위원장은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학생 연구원의 인건비는 R&D 예산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R&D 예산이 줄어들면 미래 인재를 키우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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