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안고 건넌다…8차선 횡단보도에 갇힌 노인들

정윤경 인턴기자 2023. 8. 2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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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우산, 다른 손엔 지팡이 짚고”...탑골공원 일대 가보니

(시사저널=정윤경 인턴기자)

"무릎이 아파서 빨리 못 지나가니 사고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건널목이 너무 무섭다." 

2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박아무개(80)씨는 횡단보도를 향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고 호소했다. 

박씨는 금세 빨간불로 바뀌어버리는 녹색불이 아픈 무릎만큼이나 야속하다며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 노인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상이라고 전했다. 횡단보도 앞에 선 그는 "(횡단보도를) 3분의 2쯤 지나는데 신호가 되니까 승용차가 막 나한테 오려 하더라. 그때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는 청년이 차를 막고 나를 건너가게 해주더라"며 아찔했던 경험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날도 무릎 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라던 박씨는 "차도 많고 젊은 애들이 빨리빨리 지나다니는 강남 같은 곳은 가기가 겁난다"며 "나 같은 노인들은 되도록 횡단보도가 없는 곳으로 길을 돌아 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적색 신호로 바뀌어 걸음을 서두르고 있다.ⓒ시사저널 정윤경

시사저널은 28일 오전 10시부터 네 시간 동안 광화문, 종로, 종각 일대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들을 만났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씨 탓에 박씨처럼 한 손에는 우산,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횡단보도를 조금이라도 빠른 걸음으로 가려고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접고 이를 지팡이 삼아 길을 건너는 노인도 있었다.

탑골공원 무료급식소에 도시락을 받으러 왔다던 A씨는 '횡단보도 건널 때 불편함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짧어요. 초록불 시간이 너무 짧어"라고 손사래를 쳤다. 

남편의 부축을 받고 길을 건너던 B씨(70대·여)도 "(횡단보도) 중간쯤 건너가면 마음이 급해진다"며 "그래서 빨리 건너려고 하다가 횡단보도 중간에 넘어진 적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 광화문역 부근 왕복 8차선 횡단보도에서도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졌다.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광역버스와 배달 오토바이가 노인을 가로질러 지나간 것이다. 

겨우 인도에 발을 내디딘 양아무개(80)씨는 얼마 전 폐암 수술을 받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멋쩍어했다. 양씨는 "모임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곳에 들리는데 올 때마다 무섭다"고 토로했다.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 전체 보행자 사망자 수 1093명 중 절반 이상이 만 65세 이상 노인이다. 보행 중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 중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5년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조사한 '노인 10만 명 당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서도 한국이 10년째 1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경찰청의 교통신호기 설치관리 매뉴얼에 따르면, 횡단보도 보행자 신호 시간은 보행 진입 시간 '7초'에 횡단보도 길이 1m당 1초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만일 횡단보도 길이가 24m라면, 이 길이에 따른 24초에 진입시간 7초가 더해져 31초간 보행자 신호가 유지된다. 

이 같은 기준은 일반 성인의 걸음 속도에 따른 것으로 노인이나 어린이 등 보행 약자가 건너는 구간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의 경우에는 '1m당 1초'보다 완화된 '0.8m당 1초'를 적용해 보행자 신호 시간을 결정한다. 24m짜리 횡단보도의 경우 길이에 따른 '30초'에 진입시간 7초를 더한 37초간 보행자 신호가 켜지는 셈이다. 

하지만 완화된 기준 역시 노인이나 보행 약자에게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 노인들의 보행속도는 1초당 0.85m로, 지팡이 등 보조 장치를 동반하는 경우는 초당 0.7m로 더 낮은 수준이었다. 80세 이상 고령자들로 범위를 좁힌다면 보행속도는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횡단보도 건너기가 무섭다는 건 노인들뿐만이 아니다.

8살 된 딸 둘, 6살 된 딸 한 명을 데리고 종각역 부근을 찾은 이아무개(45)씨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초조하다고 했다. 이씨는 "애 셋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니까 빨리 걷기가 힘들죠"라면서 "간혹 가다 운전자가 기다려주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신호가 바뀌면 쌩 지나쳐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중심주의'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 문화와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독일은 우리보다 녹색불 지속시간이 짧지만 중간에 적색 신호로 바뀌어도 보행자가 있으면 운전자가 일단 멈춘다"며 "교통 약자가 보행 중일 때는 자동차가 의무적으로 정지할 수 있도록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관련 법을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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