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앞에서 복숭아 뼈를 뜯다가...

칼럼니스트 최은경 2023. 8. 2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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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육아] 친정 엄마도 그땐 그랬지

8월에 두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를 낳은 것은 아니고 4년 터울로 큰아이는 11일에, 둘째 아이는 23일에 낳았다. 

큰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였다. 더위를 심하게 타시는 시어머니가 가끔씩 조리원에 오실 때면 종종 복숭아 5개가 든 상자를 내미셨다. 산모는 딱딱한 것을 못 먹으니까 물렁한 복숭아를 사 오셨던 거다. 한 박스를 다 먹을 만하면 또 사 오셨다. 해마다 아이의 생일이 돌아오고 산후조리를 떠올릴 때면 나는 그때 달게 먹던 복숭아가 생각난다.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딱히 복숭아를 좋아했던 기억이 없다. 복숭아가 그렇게 단물이 많은 과일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 내 기억에는 좀 더 저렴한 천도복숭아가 더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이맘때 복숭아를 보면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 특히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인지 여름 과일들이 다 별로 맛이 없었다. 오죽하면 수박이 무맛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올해 복숭아는 달다. 그중에서도 물렁한 복숭아가 정말 달았다.

혹시나 하고 먹어본 복숭아가 성공하자 과일을 살 일이 있으면 무조건 복숭아를 외쳤다. "올해 복숭아는 맛있어"라고 믿게 되었다. 문제라면 가격. 5개에 1만 5000원~2만 원을 줘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워낙 잘 먹어서 선뜻 지갑이 열렸다. 하루 종일 학교에 있는 고1 큰아이는 집에서 과일을 먹기도 애매한데 아침 먹을 때 "복숭아 하나 깎아줄까?" 물으면 표정이 환해졌다. 분명 방금까진 학교 가기 싫은 표정이었는데.

그 웃는 얼굴이 좋아서 개학 후엔 아침마다 복숭아를 깎고 있다. 부드러운 복숭아는 껍질도 참 부드럽지, 숭덩숭덩 잘라서 접시에 내고 나면 복숭아 뼈가 남는다. 비싸고 맛있는지라 복숭아 뼈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 복숭아 단물이 팔뚝으로 흘러내리거나 말거나 야무지게 복숭아 뼈를 뜯게 되는 이유다. 

비싸고 맛있는지라 복숭아 뼈를 그냥 버릴 수는 없다. ⓒ최은경

'아유... 내가 엄마한테 이렇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먹고 있네...' 입안은 달디단데 기억은 씁쓸하기만 하다. 좋은 것은 오로지 자식들 입에 넣어주려는 엄마가 답답해서 그 모습이 싫어서 툴툴 거리며 했던 말이다. 엄마도 좋은 것 먹고 좋은 거 입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엄마는 항상 좋은 것을 오빠와 나에게 양보했다. ⓒ최은경

엄마는 항상 좋은 것을 오빠와 나에게 양보했다. 과육이 실한 부분은 늘 우리 차지였다. 엄마도 나처럼 싱크대 앞에서 복숭아를 깎다가 복숭아 뼈를 붙잡고 남은 부분을 살뜰히 먹었을 거다. 그러면서 말했겠지. "우와... 복숭아가 엄청 달아, 어서 와서 먹어라." 마치 엄마도 온전한 복숭아를 먹은 것처럼. 그때로부터 30년은 지났을 나도 똑같이 말한다. "세상에, 복숭아가 너무 맛있다. 어서 와서 먹어"라고. 마치 나도 온전한 복숭아 하나를 먹은 것처럼. 충분히 배부르게 먹은 척.

생각해 보면 산후조리 때 먹은 복숭아까지만이 온전한 나의 복숭아였다. 그 후로 나의 복숭아는 우리의 복숭아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이들의 복숭아가.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 저녁 식사 후 복숭아를 잘라 후식으로 내면 달려드는 아이를 남편은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보고만 있다. "당신도 같이 먹어"라고 해도 "애들 더 먹여"라고 둔다. 어디 그렇게 된 게 복숭아뿐일까 싶지만. 

오해 마시라. 엄마의 희생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자장면이 좋은데 모른 척 애써 싫다고 하는 그런 엄마는 못 된다. 나는 내가 먹고 싶으면 자장면이 좋다고 말하는 엄마다. 아이들에게 "한 입만" 잘하는 엄마다. 쫌 솔직한 엄마다. 좋은 것, 맛있는 것은 나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다. 아이들이 중요하듯 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다. 

비록 아침엔 복숭아 뼈를 뜯을지언정 점심을 먹고 나서는(현재 재택근무 중이다) 온전한 복숭아를 먹겠노라 다짐하는(이게 이럴 일인가 싶지만) 엄마다. 이제 여름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 말인즉슨, 복숭아 먹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다. 지난 주말 남편이 복숭아 한 박스를 사왔다. 이번엔 무려 10개들이다.

복숭아 먹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다. 지난 주말 남편이 복숭아 한 박스를 사왔다. ⓒ최은경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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