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미술가, 초대전 열어준 국립미술관 공개 성토…왜 이 지경까지
“미안하지만 이번 전시에는 아방가르드적(전위적)인 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고자하는 것은 세월이 반세기가 되도록 과거에 했던 작업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설치 뒤 철거됐지만 40년 지난 오늘에 와서는 설치 자체도 하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런 곳인 줄 알았더라면 이 전람회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술관 상부기관인) 문체부도 마찬가지예요. 항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구축한 주역인 원로 전위예술가 김구림(87)씨가 노기띤 목소리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체육관광부를 성토하자 기자회견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24일 오전 김씨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초대전(25일부터 내년 2월12일까지) 언론설명회가 열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교육동에서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이례적인 해프닝이 벌어졌다. 작가로서는 일생일대의 영광인 단독 초대전을 마련해준 미술관 쪽에 대해 작가가 작심하고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인 비판을 쏟아낸 것이다. 1969년 옛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을 흰 천으로 싸서 묶었던 54년 전의 전위적 설치작업을 추진했던 작가는 미술관 쪽이 여러 행정적 제약 때문에 설치가 안된다고 제동을 걸자 가장 하고 싶었던 핵심 출품작 전시가 좌절됐다고 분노했다. 김구림씨는 한국 미술사에서 그림과 조각의 전통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총체적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어젖힌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되는 대가인 만큼 이날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불렀다.
“내가 할말이 없습니다. 있다가 전시장 작품을 한번 보십시오. 고리타분한 그런 것만 늘어놨다. 너무 미안하다. 여러분께. 새로운 파격적인 그런 작품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너무 죄송합니다. 내가 작가라고 어디가서 얼굴을 내밀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
침울한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전시를 깎아내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했다.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도 긴장은 이어졌다. 김 작가가 논란이 된 광목 설치 작품을 작년부터 큐레이터한테 이야기했는데 전시 개막 서너달 전에 큐레이터가 바뀌어 전달이 안 된 것을 갖고 시간이 없었다고 미술관이 변명한다고 지적하자, 유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대행(전시 1과장)이 나와 “작가가 설치작품 얘기를 꺼낸 건 지난 6월로 설치를 논의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정면반박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작가와 미술관 쪽이 건물을 광목으로 묶는 설치작품 출품에 최종 합의를 못하고 갈등이 불거졌다는 <한겨레>의 지난 15일치 단독보도 이후로 갈등이 봉합되기는커녕 더욱 깊어졌음을 이날 간담회에서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미술관 쪽과 문체부의 비협조와 출품작 제한 등을 지적하면서 명칭을 국립근대미술관으로 바꾸라고 더욱 격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서로 가벼운 대화조차도 나누지 않을 만큼 냉랭한 소통 단절의 분위기는 이날 오후 개막행사 뒤 공개된 전시장의 얼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50년대 말~60년대 초의 붓 대신 비닐 태운 흔적으로 뒤덮은 평면 추상회화부터 잔해가 널린 빗자루 설치작업, 부서진 삽, 걸레 닦은 흔적을 드러낸 판화, 얼음이 녹아 물로 변하는 현상과 흔적의 이미지 등 물질성과 비물질적 개념이 직조된 작업들, 저 유명한 1969년작 실험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같은 수작들이 곳곳에 놓여있었지만, 구획된 영역 아래 차단선을 치고 그냥 나열된 주요 연대기적 작품들을 전반적으로 부감하면서 와닿은 느낌은 ‘황학동 고물시장’의 잡동사니를 보는 듯한 잡스럽고 참담한 정서였다. 작품들에 대한 작가와의 집요하고 심층적인 토론이 반영되지 않은 채 시기별로 주요 작품들을 전시실을 바꿔가며 아카이브와 섞어 늘어놓기만 한 인상이 여실하게 다가왔다.
2006년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은 콜롬비아의 여성 예술가 도리스 살세도의 제안을 받아들여 핵심 전시공간인 터빈홀 바닥을 쩍쩍 갈라지는 균열의 무대로 만들었다. 여전한 서구 중심주의와 제국주의적 시선이 지구촌 주변부와 깊은 차별의 심연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를 내장한 이 작품은 지금도 균열을 봉합한 흔적과 함께 남아 작품의 의미를 각인시키고 있다. 이처럼 미술관은 작가와 작품의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배양시키는 곳이다. 큐레이터와 작가의 욕망과 의도는 적절한 교감과 논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인 결실로 나와야 하는데, 미술관 공간과 행정시스템의 유연성은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김구림 작가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이 기괴한 갈등은 이런 현대미술관의 진화와는 180도 어긋난 퇴행의 단면이다. 지난 실험미술기획전에 이은 김구림전의 참상은 수장이 공백인 국립미술관의 전시 시스템이 만신창이가 됐음을 보여준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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