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판 위 여성의 힘, 영화가 되다…“구기종목에선 느낄 수 없는 매력”
“여자씨름은 여성들이 스스럼없이 몸을 드러내면서 몸과 몸이 딱 붙었을 때 뿜어져 나오는 스파크 같은 게 있어요. 원초적인 즐거움과 함께 온몸으로 싸우는 주체로서 여성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구기 종목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죠.”
지난 24일 개막한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금 여기, 한국영화’ 부문에서 눈에 띄는 여성스포츠 다큐멘터리가 공개됐다. 여자씨름 선수들을 조명한 ‘모래바람’이다. 여자씨름의 매력에 빠져 7년동안 영화를 완성한 박재민(40) 감독과 구례에서 전지훈련을 하다 영화제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임수정(38) 선수를 26일 서울 마포구 메가박스 상암에서 영화 상영 직후 만났다.
직장생활 10년차에 번아웃이 당도한 터에 강남역 살인사건까지 마주하며 여성으로 느끼는 무력감이 목젖까지 차올랐던 2017년 설날 박 감독은 ‘벼락같이’ 여자씨름을 만났다. “설에 큰집 가서 친척들에게 ‘언제 결혼할래?’ 잔소리만 듣느니 그냥 집에 있으라는 부모님 말씀을 듣고 혼자 뒹굴대다 여자씨름 중계를 보게 됐어요. 사실 그 전에는 여자씨름이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당시 ‘미투’운동이나 강남역 살인사건을 지켜보면서 강한 여성성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순식간에 가공할 힘을 발휘하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어요. 많은 여자들이 가사노동에 치이는 명절에 남자들이 차지한 티브이에서 여자씨름 선수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도 너무나 신선했죠.” 영화수입사에서 경영지원 일을 하고 있었지만 카메라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박 감독은 이 순간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곧바로 영화제작 워크숍에 등록했다.
“여자씨름 홍보가 된다니까 촬영에 응하긴 했지만 시합에 지면 기분도 안 좋은데 카메라가 따라오니 불편하기도 했죠. 또 하필 계속 이기다가 지기 시작했을 때쯤 촬영이 늘어나면서 이게 어떻게 나올지 걱정도 됐고. 영화 본 친구들이 너 저렇게 많이 졌어? 맨날 이긴 거 아니었어? 묻곤 해요.” 자신의 체급(국화급)보다 높은 체급(무궁화급)의 선수들까지 메다꽂으며 여덟번이나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여자 이만기’라는 별명을 얻은 임수정 선수는 한국 여자씨름계의 최고 스타다. 동아대 체대 시절 교내 체육대회 씨름시합에 우연히 나가 우승한 뒤 씨름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여자씨름은 엘리트 체육이 아닌 생활 체육 기반 종목이라 개인 트레이너로 일하며 10년 동안 동호회 활동을 하다 2016년 콜핑 실업팀이 만들어지면서 전문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왜 이 재밌는 걸 남자만 하지? 여자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싶어 덤볐지만 남성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았어요. 여자씨름은 올해에야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됐을 정도니까요.” 실업팀에 소속되기 전에는 중학교 씨름장을 잠깐 빌려서 남학생들과 연습하고 끝나면 발만 닦고 황급히 나와야 할 정도로 연습여건도 열악했지만 씨름이 좋아서 놓지 않았던 동료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영화는 임 선수를 중심으로 송송화, 김다혜, 최희화, 양윤서 선수 등 콜핑팀에서 함께 땀 흘렸던 선수들의 활약과 열정을 담았다. 카메라는 30대 중반에 선수로서 갈림길에 섰던 임 선수의 고뇌도 놓치지 않는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후배한테 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하지만 패배보다 더 힘들었던 건, 주변에서 언제 결혼할래, 언제 은퇴할 거야, 질문을 끊임없이 받는 거였죠. 내가 뭐 잘못하고 있나? 운동 더 하면 여자로서 내 삶은 끝나는 건가? 불안한 시기였어요.” 지금은 영화 속에서 눈물 흘리던 자신을 다독여주고 싶다는 임 선수는 슬럼프를 훌훌 털고 일어나 2021년 다시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했고 “후배들에게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본보기가 된 거 같아서 기쁘다”고 했다.
임 선수가 화려하게 재기하는 장면은 스크린에 담기지 않았다. 고민 끝에 콜핑과 이별하고 영동군청으로 이적한 임 선수가 첫 경기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끝난다. 박 감독은 “승리나 성공보다는 ‘간절함’에 집중하고 싶어 이런 마무리를 택했다”고 말했다. “‘왕언니’인 송송화 선수의 말처럼 여자씨름 선수들은 씨름을 밥벌이나 성공보다는 삶의 가장 큰 즐거움, 활력소로 여기고 생계활동을 병행하며 간절하게 매달려온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눈앞이 캄캄할 때 하루하루 버틸 힘을 주는 건 이런 즐거움, 활력소들이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요. 영화를 본 관객들도 내 삶에 ‘모래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활력소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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