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인물이 놀란 감독과 만나면?

임지영 기자 2023. 8. 29.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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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개봉했다. 압도적 연출과 ‘역대급 캐스팅’이라는 찬사와 ‘길고 지루하다’는 혹평이 엇갈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첫 전기영화로도 주목받았다.

심채경 천문학자가 ‘놀란(be surprised)’과 ‘논란(controversy)’의 뜻에 대해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한국어로 자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내놓는 작품마다 대중을 놀라게 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논의하게 만드는 점에서 놀란 감독을 정확히 묘사한다.” 한국 관객들의 오랜 ‘언어유희’가 마침내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녹화한 tvN 〈알쓸별잡〉의 한 장면이다. 그의 신작 〈오펜하이머〉도 이런 견해와 일치하는 작품이다. 여러 방면에서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영화이고, 호불호를 떠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뭔가 말하게 만드는 영화다.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오펜하이머〉가 북미 개봉(7월21일) 3주 만에 전 세계에서 약 6억5000만 달러 수익을 올리며 오프닝 성적으로는 그의 전작인 〈인셉션〉〈인터스텔라〉〈덩케르크〉를 뛰어넘었다. 3시간의 러닝타임, 난무하는 과학용어, 폭발 장면을 빼고는 ‘구강 액션’이 볼거리의 전부임에도 관객의 선택을 받은 셈이다. 같은 날 개봉한 〈바비〉와 함께 바벤하이머(바비+오펜하이머) 밈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커리어의 정점이자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콜라이더〉)” “초대형 걸작(〈워싱턴포스트〉)” 등 외신의 호평도 이어졌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다. ⓒ유니버설 픽쳐스

8월15일 한국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개봉했다. 압도적 연출과 '역대급 캐스팅'이라는 찬사와 ‘길고 지루하다’는 혹평이 엇갈렸다. 다만 첫날 관객 55만명을 동원해 국내 개봉한 그의 영화 중 가장 ‘뜨거운 출발’을 알렸다. 이번 영화는 놀란 감독의 첫 전기영화로도 주목받았다. 2006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원작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유수의 과학자들을 한데 모아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다. 〈인터스텔라〉와 〈테넷〉에 이어 노벨상 수상자인 이론 물리학자인 킵 손의 조언을 받았다.

전기영화를 만들 때의 어려움은 실존 인물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점이다. ‘배트맨 시리즈’와 〈인셉션〉 등 가상 현실을 주로 다뤄온 놀란 감독은 왜 실존 인물에게 끌렸을까. 그는 '복잡한 인물에 끌린다'고 말해왔다. 놀란 감독이 추구하는 “인간적 결함을 가진, 복잡한 상황에 처한 인물”과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이야기”에 오펜하이머는 최적화된 소재다. “매혹적이고 괴팍한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일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열망과 불안의 화신이었다. 항상 동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론 물리학의 촉망받는 학생이던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교사의 책상에 놓인 사과에 독을 타기도 한다(〈워싱턴포스트〉).” 노벨상 수상자 17명을 포함한 천재 과학자들을 조율한 과학자이자 행정가였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밉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유니버설 픽처스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컸던 시기 영국에서 자란 놀란 감독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좋든 싫든 오펜하이머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세상에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도 나오는 구절은 이 영화가 다루려는 주제를 반영한다.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극 중 오펜하이머도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을 빌려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실험이 성공해도 영화는 계속된다

놀란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시점은 쪼개지고 교차된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매카시즘’ 광풍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된 보안 청문회 장면, 사적 복수심에 사로잡혀 오펜하이머를 궁지로 내몬 스트로스 상무장관의 인사청문회 전후, 이렇게 세 가지 시점이다. 초중반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집중한다. 관객 모두 오펜하이머의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손에 땀이 난다. 긴 여정을 긴장감 있게 요약하는 연출력과 다른 캐릭터와의 크고 작은 갈등, 영화의 완급을 조절하는 음악 등의 영향이다. 원자폭탄의 연쇄 충돌로 지구 대기가 전부 불타 세계가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장면도 긴장감을 높인다.

실제 오펜하이머의 생전 모습. 

실험의 성공으로도, 그로 인한 종전으로도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한 시간가량, 오펜하이머가 겪는 심리 변화에 집중한다. 특히 그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독대 장면이 인상적이다. 오펜하이머가 “내 손에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자신이라며 그를 ‘징징거리는 애송이’로 치부한다. ‘대통령실’에서 나오는 오펜하이머의 표정에 어떤 변화가 감지된다. 그의 서사를 좇다 보면 어느 순간 관객 스스로도 연루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가디언〉은 오펜하이머를 ‘원자 시대의 프랑켄슈타인’에 비유했다.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괴물은 오펜하이머의 발명품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불러일으킨 파멸에 대한 욕망이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오펜하이머의 공허한 얼굴에서 그 깨달음이 드러난다.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 역)의 멀리 내다보는 얼음 조각 같은 눈빛이 이보다 더 잘 활용된 적이 없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지금 시기 시사하는 바가 있다.

놀란 감독은 디지털 시대, 필름 촬영을 고집하며 CG에 의존하지 않고 실사 촬영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의 핵폭발 장면도 예외는 아니다(단순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영화는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신념도 강해 오랜 파트너였던 워너브러더스와 결별한 이유를 전작 〈테넷〉을 극장과 OTT에서 동시 개봉한 데서 찾기도 한다. 미국 대중문화 잡지 〈버라이어티〉는 이번 작품을 두고 ‘영화관에 가는 이유를 상기시키는 이정표가 될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배트맨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아이맥스용 필름으로 촬영했다.

영화의 후반부는 오펜하이머가 겪는 심리 변화에 집중한다.  ⓒ유니버설픽처스

관객들에게 크리스토퍼 놀란은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각인되어 있다. 2001년 10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시점에서 역순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메멘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등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선악의 존재론적 딜레마를 다루는 등 기존 히어로물의 문법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꿈에 침투하는 이야기를 통해 무의식의 시각화를 구현해낸 〈인셉션〉도 있다. 우주라는 시공간을 방 안의 서재와 옥수수밭으로 구현한 〈인터스텔라〉는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미국을 제외한 국가 중 가장 큰 매출을 기록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폭탄을 제거하는 영웅이 아니라 폭탄을 제조하는 ‘낯선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스트로스 상무장관의 인사청문회는 흑백으로 진행된다.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미드 다바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아이〉 기고글에서 중산층이 주로 사는 뉴욕 맨해튼 영화관에서는 티켓이 매진되었지만 노동자 계층이 찾는 뉴욕 할렘 영화관에는 표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놀란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 사람을 미화하는 데 자신의 풍부한 자원을 쏟아부었다"라고 비판했다. 영화가 로스앨러모스 노동력의 11%를 차지했던 여성 노동자와 과학자들의 업적을 외면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무언가 더 알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이게 되는 관객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원자폭탄을 다룬 〈트리니티 다음 날〉 같은 다큐멘터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한국 서점가에는 원작과 각본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데 이어 양자역학을 다룬 동영상 조회수가 크게 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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