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고현정 "난 2등이다"
이한별·나나와 한 캐릭터 3등분 해 연기
"장르물 기다려…원하던 캐릭터 들어와"
"머리 짧게 자를 땐 살짝 겁이 나기도"
"역할은 상관 없어…작은 역할도 괜찮다"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글쎄요…저는 제가 완전히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해 본 적이 있나 싶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이 말을 한 배우가 고현정(52)이라고 하면 납득이 될까. 고개를 갸우뚱 하자 그가 덧붙였다. "'모래시계' 때 저는 태수와 우석 사이에 있는 곁다리였잖아요.(웃음) '선덕여왕'은 선덕여왕이 주인공이죠. 전 미실이었고요. 원래 25회만 출연하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분량이 늘어난 거예요. '대물'에서 대물은 사실 권상우씨가 연기한 '하도야'죠.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고현정은 반복해서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미스코리아 때도 전 2등이었요."
그렇다면 고현정이 2등과 운을 언급하며 부러 자신을 낮추는 것과 그가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8월18일 공개)을 선택한 것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이 작품에 고현정이 나온다고 하면 당연히 그가 타이틀 롤인 마스크걸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그는 '마스크걸'에서 마스크걸이다. 그런데 고현정만 마스크걸인 건 아니다. 배우 이한별과 나나가 같은 캐릭터를 나눠 연기했다. 말하자면 3인 1역. 7부작인 이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등장하는 건 6회 중반부터. 그러니까 고현정의 분량은 3분의1일이 채 되지 않는다. 고현정은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아니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이번에도 "완전히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올 게 왔구나, 싶었죠. 그동안 저한테 들어오는 작품들이 대체로 비슷했어요. 제가 개인적인 생활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니까, 작품에서 이미지가 고정돼 있는 것인지 몰라도 항상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다가 이런 장르물이 들어온 거예요. 게다가 작품도 좋더라고요. 무조건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전 항상 저 혼자 이고 지고 가는 역할만 했잖아요.(웃음) 그게 아니라서 좋았어요. 여러 배우들과 협력해야 하고, 심지어 하나의 캐릭터를 세 사람이 같이 연기해야 하니까…이런 게 제가 원하던 거였습니다."
세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간 마스크걸 김모미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고현정은 김모미가 감옥에 간 뒤 10년이 흐른 시점의 그를 연기했다. 숏커트 한 머리, 필요할 때 외엔 꾹 다물고 있는 입, 비쩍 마른 몸, 관리 안 된 피부, 초점이 사라진 듯한 눈. 그간 숱한 영화·드라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온 고현정이지만,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다. "처음엔 머리를 그렇게 짧게 자르진 않았어요. 좀 겁이 났거든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곤란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짧게 잘랐어요. 그제서야 감독님이 아주 만족하더라고요.(웃음) 그동안 제가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저한테서 꼭 찾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고현정은 김모미를 감옥에서 10년 보낸 사람이라는 점에 중점을 둬 그려나갔다고 했다. 그는 "김모미의 현 상태에 집중했다"며 "김모미의 오늘, 현재만을 생각했고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한별의 김모미가 괴상하고 서글프다면, 나나의 김모미의 울적하고 파워풀하다. 그리고 고현정의 김모미는 외로우면서 묵직하다.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캐릭터다. 고현정은 자신의 김모미를 "깊은 강 바닥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평소에는 아주 낮은 텐션을 유지하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깊은 강 바닥 같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한 번 움직이면 크게 움직이죠. 일단 에너지를 쓰기 시작하면 폭발적으로 쓰는 겁니다."
감옥에서 침잠해 있던 김모미를 움직이는 건 딸이다. 갓난아기 때 엄마에게 맡겨 놨고, 이제 중학생이 된 딸 김미모. 김모미를 원수로 여기는 김경자는 김미모를 사실상 인질로 잡고 김모미를 겁박한다. '너도 똑같이 당해봐.' 그래서 김모미는 탈옥을 감행한다. 딸을 구하기 위해서.
김모미의 행동은 모성애(母性愛)로 해석될 수 있지만, '마스크걸'엔 흔한 영화·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구구절절한 감상 따윈 없다. 김모미는 역시나 말없이 최선을 다해 딸을 지킨다. 역동적이지만 역시나 건조하다. 고현정은 "모성이라는 건 다 다른 것이기 때문에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작품들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게 나올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뻔한 모성으로 표현하면 클리셰 같고, 구차할 것 같고 지루할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모성이 항상 뜨겁고 아름답게 그려지잖아요. 너무 드라마틱 해요.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전 모성을 그런 식으로 느끼지 못했어요. 김모미에게 모성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감독님과 상의해서 모성을 드러내는 부분을 최대한 생략했어요. 그렇게 표현된 모성이 '마스크걸'의 모성이라면 모성이에요."
고현정은 '마스크걸'의 결말을 해방으로 표현했다. "결국 인간 개인의 해방감을 맛 보는 거죠." 김모미가 자신을 속박했던 것들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스크걸'은 고현정을 고정된 이미지에서 해방해주는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 많이 쓰이고 싶어요. 어떤 역할이든 상관 없어요. 작은 역할도 좋아요."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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