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학살, 책임은커녕 조사도 발뺌…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

김소연 2023. 8. 2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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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가와 야스히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장
간토 대지진 100년…49년 동안 해마다 도쿄서 추도식
미야가와 야스히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 위원장. 도쿄/김소연 특파원

“조선인 학살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계속 이야기를 해나갈 겁니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입니다.”

한·일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일본 시민들이 50년 가까이 해마다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을 위한 추도식을 열고 있다. ‘일조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그 주인공이다. 간토대지진 100년을 맞는 올해도 9월1일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추도식이 예정돼 있다. 미야가와 야스히코(82) 실행위원장을 지난 16일 도쿄 자택에서 만났다.

“추도의 시작점은 대지진 40년이 되던 1963년입니다. 조선인 학살 사실을 제대로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운동이 간토 곳곳에서 있었어요. 일조협회 등도 조사반을 만들어 약 10년 동안 유족과 목격자를 만나고 자료를 찾아 나섰습니다.” 증언과 자료를 모을수록 일본 정부의 은폐로 흐릿하기만 했던, 그날의 참상이 명확해졌다. 이들은 끔찍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조선인을 추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73년 대지진 50년을 맞아 대대적인 모금을 통해 추모비를 만들었다. “지금 분위기에선 믿어지지 않겠지만, 추모비를 만들 때 도쿄도의회 자민당·공명당·사회당·공산당 등 각 당 간사장이 대표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조선인 학살 추모비는 도쿄도에 기증됐고, 도립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는 추모비 내용을 두고 도쿄도와 어쩔 수 없는 타협도 하게 됐다. 추모비 첫 줄에는 ‘1923년 9월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6천여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고귀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애초 시민단체가 추진한 비문에는 ‘관헌에 의한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라고 표현하는 등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했지만 결국 ‘주어’가 빠지게 됐다.

“도쿄도는 추모비 비문 내용에 관여를 했습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비문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2017년 이후 7년째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미야가와 위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겉으로는 개별 행사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조선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과거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죠.”

2020년 9월1일 일본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97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추도비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야가와 위원장은 고이케 지사의 추도문 거부는 ‘조선인 학살’을 왜곡하는 극우 세력의 역사 인식과 연결돼 있다고 본다. 일본 극우단체들은 간토대지진의 조선인 피해자 수가 부풀려졌고, 학살도 당시 조선인들이 일으킨 폭동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한다. 조선인 추모비 철거도 요구하고 있다. ‘소요카제’라는 이름의 극우단체는 고이케 지사가 추도문을 거부한 2017년부터 조선인 학살 추도식이 열리는 공원 인근에서 “조선인 6천명 학살은 거짓말” 등을 외치며 사실상 방해 집회를 하고 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요. 극우단체가 계속 갈등을 일으켜 조선인 추도식도 못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에요.” 다만 고이케 지사의 추도문 거부와 극우단체의 방해 집회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추도식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이전보다 훨씬 늘었다고 한다.

미야가와 위원장은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서고, 그날의 참상이 ‘국가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2003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에게 보낸 권고서를 강조했다. 연합회는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국가는 책임을 지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고, 학살의 전모와 진상을 조사해서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20년째 답이 없다.

“식민지 지배로 인한 차별과 편견, ‘3·1 독립운동’ 등 저항하는 조선인에 대한 지배자들의 공포감 등이 맞물리면서 비극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조선인 학살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에요. 100년이 지나도 그날의 진실을 알리는 추도식은 계속될 겁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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