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새 신분 움켜쥔 '한 남자'…그 뒷모습서 발견한 '나'
누군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따라 밟아나갈 때 만날 수 있는 건 '질문'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등의 질문 말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질문은 '그 혹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한 남자'는 한 남자의 정체를 쫓는 또 다른 한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나'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다.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는 어느 날 의뢰인 리에(안도 사쿠라)로부터 그의 죽은 남편인 다이스케(쿠보타 마사타카)의 신원조사를 해달라는 기묘한 의뢰를 받는다. 사랑했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떠난 후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다이스케의 형 쿄이치(마시마 히데카즈)가 찾아와 영정을 보고는 "이 사람은 다이스케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키도는 한순간에 정체가 묘연해진 다이스케, 아니 남자 X의 거짓된 인생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진실에 다가설수록 충격적인 과거들이 드러나며, 키도의 내면에는 'X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으로 살아 왔던 건가'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함께 일본 영화계를 이끌어갈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이번엔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 남자'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물론 제79회 베니스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은 바 있다. 특히 제46회 일본아카데미에서는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한 남자'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한 남자가 그려진 그림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죠하츠'(じょうはつ·蒸発)는 '자발적 실종'을 뜻하는 단어로, 하루아침에 이름, 신분, 가족, 지인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영화는 키도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신분인 '다이스케'로 살아가던 'X'의 진짜 정체를 파헤친다는 미스터리 구조를 따라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왜 X는 다이스케로 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연을 깊게 들여다본다.
'한 남자'를 이끌어가는 큰 질문은 "'X'는 누구인가?"이다. 여기서 X는 정체를 알 수 없게 된 다이스케를 의미한다. 다이스케가 알고 보니 다이스케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럼 다이스케가 아닌 진짜 그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알 수 없기에 'X'라고 한 뒤 그의 정체를 뒤쫓는다.
X가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키도는 그 누구보다 X만을 바라보고 X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X의 정체를 파헤쳐 가는 과정에서 키도는 점점 X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X가 걸어온 길을 뒤따른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의 삶의 흔적을 따라 고스란히 발걸음을 옮기며 X를 깊숙하게 알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X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 키도이기에 X를 알아간다는 건 '자기 자신'을 알게 됐다는 걸 뜻한다.
키도가 밝혀낸 X의 진짜 삶은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지며 평생을 괴로워했던 한 남자였다. 살인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와 그를 꼭 빼닮은 자신의 얼굴이 증오스러웠던 한 남자는 평생을 괴로워한 끝에 자신을 이뤄온 것들을 모두 버리고 '다이스케'라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러나 단순히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얻음으로써 살인자의 아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X가 비로소 다이스케가 된 건 바로 리에를 통해서다. 리에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가족을 꾸리게 되면서 X는 비로소 다이스케, 즉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희망을 얻은 것이다.
X의 삶을 들여다본 키도는 재일교포 3세로서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 즉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을 이루는 것들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키도 역시 X의 정체를 뒤쫓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다시 말해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추적과 같은 여정에서 X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키도 역시 자신을 이해하고 비로소 '한 남자', 즉 '한 사람'으로서 거듭나게 된다.
영화 초반과 마지막, 한 남자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림이 나온 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겼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고민하는 X와 키도는 모두 '한 남자'였던 거다. 그리고 X를 바라보며 뒤쫓았던 키도를 뒤쫓으며 엔딩에 도달한 순간, 관객 역시 키도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X'에 어떤 이름이 들어간다 해도 '나'는 '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다이스케의 진짜 정체를 쫓을 때 그를 'X'라 규정한 것은 마치 미지수 X처럼 아직 알고 있지 못한 어떤 사람이지만, 그 삶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X라는 존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X의 삶은 리에를 만남으로써 그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자기 자신'이 됐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한 사람'으로서 거듭날 수 있게 만드는 건 '사랑'이다.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을 알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기에 이른 다이스케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다. 이는 키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영화 속 마지막 키도의 모습은 왜 영화 제목이 '한 남자'였으며 '한 남자'의 삶을 뒤쫓았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기에, 이를 마치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인물처럼 섬세하고 현실감 있게 그려낼 수 있는 배우가 필수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 쿠보타 마사타카는 너무나도 뛰어나게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고민과 투쟁을 눈부시도록 처절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리고 이시카와 케이는 왜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지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관객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될 것이다. 그가 던진 "X란 누구인가"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말이다.
122분 상영, 8월 30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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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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