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부터 93년생까지… 세대 넘어 돌아온 국극

이태훈 기자 2023. 8.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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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K뮤지컬 원조의 귀환
‘레전드 춘향전’ 리허설 현장
많게는 60살 이상 차이 나는 1~2세대 배우들과 함께 31일 ‘레전드 춘향전’ 무대에 함께 서는 3세대 국극 배우 박수빈(38)과 황지영(30). 무형문화재 판소리 명창에게 직접 배운 소리꾼이기도 한 두 사람은 여성국극제작소를 세우고 전통 국극의 새로운 부활을 위해 함께 노력해왔다. /여성국극제작소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국극(國劇)은 가장 화려하고 무게 있고 세련된 음악극입니다. 더 많은 분들에게 그 ‘맛’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광복 뒤 국악원 산하에 국극사가 만들어지며 창극은 ‘민족 오페라’, 즉 국극(國劇)으로 명명됐다. 그중 여성이 남녀 역할을 모두 맡았던 여성 국극(國劇)은 1950년대 올리는 공연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 이른바 ‘사생(死生)팬’들이 목숨 걸고 배우 뒤를 쫓아다녔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장르.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옛 전통인 줄만 알았는데,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38) 대표와 황지영(30) 배우의 확신에 찬 이야기 속에 국극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었다. ”1950년대에 이미 속이 비치는 시스루 의상을 입고, 주한미군을 통해 흘러든 미러볼을 무대 조명으로 쓸 만큼 혁신적이었어요. 판소리 창법을 기반으로 하되 완전히 새로 쓴 대본과 이야기,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장단, 일자무식 서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사와 파격적인 조명과 의상, 무대로 한 시대를 휩쓸었던 창작극이었죠.” 요즘 말로 국극은 ‘창작 K뮤지컬’의 원조였던 셈이다.

국극의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여성 국극의 1~3세대가 오는 31일 경기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레전드 춘향전’ 무대에 함께 오른다. 변학도 역의 최연장자인 1930년생 이소자 배우는 93세, 춘향 역의 가장 어린 황지영 배우는 93년생.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63년이다.

31일 경기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레전드 춘향전’ 포스터. 국극 전성기를 이끌었던 1세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2세대,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해온 3세대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여성국극제작소

이번 공연엔 국극 전성기를 이끌었던 1세대 배우 이소자, 조영숙(90)이 앞장서고, 그 명맥을 이어온 2세대 배우 이미자(79), 이옥천(78), 김성예(70)가 힘을 보탠다. 안산에 여성국극제작소를 세우고 1·2인극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해온 박수빈, 황지영 등 3세대 배우들도 함께 했다.

지난 22일 서울 양재동 연습실에서 첫 ‘런스루(run-thorugh·전체 점검 리허설)’에 앞서 배우들을 만났다. 주로 남녀 주인공 사이를 훼방 놓는 남자 악역 1인자로 불렸던 이소자(93) 배우는 이번에도 변학도 역할. “한창 인기일 땐 대구 공연 마친 뒤 악극단에 납치당해 억지로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니까. 지금도 내 소원은 아주 가기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대(大)춘향전 한 번 때리고 가는 거야.”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걸걸한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최근 책 ‘여성 국극의 뒤안길’을 펴내고 북 토크도 열었던 조영숙 배우는 ‘산마이(가부키의 ‘三枚’에서 유래한 코믹한 남성 조연을 가리키는 말)’ 1인자였다. 이번엔 월매 역할. “국극 ‘해님과 달님’이 한창 인기일 땐 서울 시내는 아침에 해님으로 뜨고 저녁에 달님으로 진다고 했었지. 내가 한 건 시침 뚝 떼고 익살을 떨면 박수가 ‘차르르~’ 나오는 멋들어지고 고급스러운 코미디였어.”

22일 서울 양재동 연습실에서 첫 런스루(전체 점검 리허설) 중인 '레전드 춘향전'의 배우들. 국극 2세대 김성예(70) 배우는 ‘춘향’, 3세대 박수빈(38) 배우는 ‘몽룡’으로 함께 무대에 선다. /이태훈 기자
남역 주인공으로 명성 높았던 국극 2세대 이옥천(78) 배우는 부채를 들고 대사와 소리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카리스마 넘치는 ‘몽룡’이 됐다. /이태훈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인 국극 1세대 조영숙(90) 배우는 ‘월매’ 역할이다. /이태훈 기자

여성 국극의 시작은 1948년 공연한 ‘옥중화(獄中花)’라는 것이 통설이다. 여성 판소리 명창 박녹주(1905~1979)가 당시 국악 단체들의 남성 중심 운영에 반발,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고 춘향전을 창극으로 바꿔 무대에 올렸다. 이후 오페라 ‘투란도트’를 번안한 ‘해님과 달님’ 흥행 뒤 1950년대 국극은 남역(男役) 배우로 이름을 날린 임춘앵(1923~1971)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극단이 난립하며 작품 질이 떨어지고, 임춘앵의 뒤를 잇는 스타 양성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텔레비전 등과의 경쟁에 밀리며 1960년대 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여성 국극을 향해서는 ‘왜색(倭色)’이라는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선 광둥어를 사용하는 중국 남부의 월극(越劇), 전철 회사가 시작한 일본의 다카라즈카(宝塚) 가극단 등 여성이 남성 역할까지 맡는 공연들이 생겨나고 발전했다. 박수빈·황지영 배우는 “동아시아 전통 문화는 옛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고, 특히 우리나라는 근대 문화의 대부분 분야가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유독 여성 국극만 가장 혹독하게 박해 당했고 민속학에서도 부정적으로 다뤘다”며 “다카라즈카는 체계적 교육기관을 통해 양성된 여성 배우들의 서양식 뮤지컬로, 배우가 여성이라는 것 외엔 판소리 기반의 국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처럼 전통을 계승해 발전시키지 못한 걸 부끄러워 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레전드 춘향전’은 세대를 엇갈려 조합하는 독특한 무대가 될 예정. 김성녀(73)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동생인 국극 2세대 김성예(70)와 3세대 황지영 배우가 함께 ‘춘향’을 맡고, 2세대 이옥천(78)과 3세대 박수빈 배우가 ‘몽룡’을 맡아 40년 훌쩍 넘게 차이 나는 춘향과 몽룡 커플로 함께 무대에 선다. 이옥천 배우는 “젊은 배우들 보면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국극단 만들어 공연하러 다녔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그저 고맙고 기특할 뿐”이라고 했다. 김성예 배우는 “함께 하자고 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들이라면 그들만의 젊은 스타일로 신세대가 좋아할 수 있는 여성 국극을 꼭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이번 공연의 산파역이었던 안산문화재단의 조형준 공연기획부장은 “국극의 젊은 3세대는 어떻게 국극의 매력을 새롭게 변용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이들에게 국극은 과거에 갇힌 전통이 아닌 미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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