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나도 당했다, 보이스피싱
수년 전 일이다. 그때 나는 참 마음이 불안정했다. 아침에 시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회사에 갔다.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을 그 전화를 넙죽 받아, 뭐에 홀렸는지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건네주고 말았다. 지나고 보니 분명 내 마음이 정상이었으면 알아챌 수 있는 징후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마음이 흔들렸고, 그 마음의 틈을 사기꾼이 헤집고 들어왔다. CCTV도 없는 곳에서 사기꾼 일당에게 돈을 건넸다. 사기를 당하고서도 한참 지나서야 사기를 당한 줄 알 정도로 그 당시 나의 마음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경찰서에 달려가서 울면서 신고를 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괜찮다며 같이 부둥켜안고 울어주신 시어머니와 신랑이 지금도 고맙다. 나를 비난하지 않고 마음으로 품어주셨다. 아버지는 네가 10년 후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회복이 안 되었을 텐데 그래도 회복 가능한 나이인 지금 겪어 다행이다, 오히려 감사하자고 했다. 묘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덕분에 나를 괴롭히는 것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같이 마음 아파해주고 손을 내밀어 준 가족이 있었기에 충격적인 사건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일주일 뒤에 벌벌 떨면서 내가 현금을 찾은 은행에 가서 다시 돈을 뽑았다. 떨리고 무서웠지만 이대로 놔두면 내가 그 두려움을 너무 키울 것 같아서 힘을 냈다. 그렇게 이겨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일을 당하니 자기도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며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동생도 그랬어, 우리 회사 친구도 육아휴직 중에 그런 일을 당했어, 심지어 친한 기자도 자기도 유사한 금융 사기를 당했다며 몰래 고백해왔다. 다들 너만 그런 게 아니라며 함께 아파해줬다. 인생에 고난과 고통은 분명히 있다. 안 당하고 살면 좋은데 종종 이런 불행을 겪는다. 그런 괴로움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이 보인다. 내 취약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나는 나와 마주할 수 있게 되고, 상처받은 다른 이들과도 만나게 된다. 상처받은 자국은 남지만, 나이테처럼 조금은 자라고 조금은 넓어져서 다른 이들에게 손을 건넬 수 있게 된다. 그때 나에게 손 내밀어 위로해준 손길들을 기억한다. 덕분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자수첩] ‘전공의 리더’ 박단, 이젠 전면에 나서라
- 부산·제주대 의대도 학생들 휴학계 승인
- “여·의·정 협의체 합의가 곧 정책… 성탄 선물 드릴 것”
- 젤렌스키 “우크라, 러·북한군 5만명과 교전중”
- [알립니다] 美 대선 이후 한미 관계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
- [알립니다] 제15회 민세상 수상자 정진석 교수·이미경 이사
- [팔면봉] 尹 대통령, 임기 반환점 맞아 “소득·교육 양극화 타개.” 외
- 딸이 돼버린 아들… 머스크 “워크가 내 아들 살해”
- “머스크는 수퍼 천재다” 트럼프가 인정한 남자
- “美가 이끈 자유주의 국제질서 바뀌어… 이분법적 세계관을 버려야 기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