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머릿속 생각 읽는다… 뇌전증 환자가 속으로 노래한 핑크 플로이드

박건형 테크부장 2023. 8.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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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뇌파 해독, 환자가 마음으로 떠올린 멜로디·가사도 재현
‘뇌·기계 연결’ 기술 활용해 루게릭병 환자와도 대화 가능해져
머스크 “뇌 임플란트로 마비 환자 걷게 하고 뇌·척추 장애 극복”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UC 버클리 신경과학 연구실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진 박자와 음정이지만 “결국 벽 속의 벽돌일 뿐(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이라는 가사까지 구분할 수 있었다. 전설적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1979년 곡 ‘어나더 브릭 인 더 월(파트 1)’ 새 버전을 만든 것은 뇌전증(간질) 환자의 뇌파였다.

3분 11초에 불과한 이 노래를 연구실에서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버클리 연구팀은 2012년 뉴욕 알바니 메디컬 센터에서 뇌전증 환자 29명에게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들의 뇌전도(EEG)를 기록했다. 환자들은 모두 뇌전증 발작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기 위해 뇌 표면에 손톱 모양 백금-이리듐 전극 36~250개를 삽입하는 뇌 임플란트 수술을 받았다.

최근까지 뇌파로 사람 생각을 읽는 것은 단어, 짧은 문장, 간단한 행동 의도 정도만 가능했다.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 뒤 나오는 뇌파와 짝짓는 식이다. 사람마다 뇌파 형태나 강도가 다르고 뇌파를 해독하는 ‘디코딩’ 기술도 한계가 있었다. 버클리 연구팀은 디코딩에 인공지능(AI)을 활용했다. AI로 환자 29명 뇌의 전극 2379개가 핑크 플로이드 노래를 들을 당시 각각 어떤 뇌파를 기록했는지 분류하고 패턴을 찾거나 잡음을 제거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 결과 뇌전도 기록에서 음악을 읽는 법을 찾아내 음원을 만들 수 있었다. 연구팀은 지난 15일 ‘플로스 생물학’ 논문에서 “전극이 없는 곳까지 포함한 전체 뇌파를 읽을 수 있으면 노래는 더욱 완벽해질 것”이라고 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노래를 모두가 함께 듣는 세상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컴퓨터로 사람의 생각을 읽는 ‘뇌-기계 인터페이스(BMI·Brain-machine Interface)’ 기술이 만든 희망이다.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23일 네이처에 “AI를 활용해 목소리를 잃은 환자가 분당 62단어 속도로 대화할 수 있는 BMI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68세의 전직 승마 선수 팻 베넷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흔히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퇴행성 질환으로 입과 목의 근육이 마비돼 말을 할 수 없다. 연구팀은 베넷의 뇌에 120개 전극을 심고 컴퓨터 화면으로 다양한 문장을 보여주며 뇌파를 기록했다. 4개월이 지나자 컴퓨터는 베넷이 생각하는 단어 12만5000개를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베넷이 단어를 떠올리면 AI가 단어 사이의 문맥을 읽어 75% 정확도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오픈AI의 생성형 AI 챗GPT가 문장을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다. 3년 전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연구에서 50개 단어를 분당 18개씩 인식했던 것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빨라졌다. 비장애인의 대화 속도는 분당 150~200단어다.

BMI는 언어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한계도 뛰어넘는다. 사지마비 환자가 로봇팔로 식사를 하고 물을 마시는 일, 외골격(外骨格) 로봇을 입고 천천히 걷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은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기타 연주를 하거나 비행기 조종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BMI는 머지않아 연구실을 벗어날 전망이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를 비롯해 파라드로믹스, 프리시전 뉴로사이언스, 블랙록 뉴로테크 등 수많은 실리콘밸리 바이오 기업이 사람의 생각을 읽고 저장하는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미 미 식품의약국 임상 허가를 요청한 곳도 있다. 머스크는 1024개의 전극을 가진 뉴럴링크 뇌 임플란트에 대해 “하반신마비 환자를 다시 걷게 하고, 뇌·척추 장애를 극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머스크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지라도, 이런 기술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2018년 세상을 떠난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으로 목소리를 잃은 뒤 음성 합성으로 소통했다.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 분당 15단어였던 대화 속도는 말년엔 분당 한 단어까지 줄었다. 현재의 BMI 기술이 호킹의 시대에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더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까. 과학의 힘이 더 많은 장애인을 세상과 연결하고, 언젠가 장애를 특별하지 않은 일로 만들어주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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