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10] ‘사라질 권리’를 응원한다
2001년 9월 11일 밤. 미국은 화요일 아침이던 그밤. 나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정체불명 공격을 받았다는 긴급 뉴스를 TV로 보고 있었다.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200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망했다. 원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였지만, 최전성기가 삶의 막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기억이 인상적이어서 그럴까, 이십여 년 전인 2000년대 초가 어제처럼 여겨진다.
나는 내가 20세기에 절반, 21세기에 절반을 살다가 죽는 시간적 위치에서 출생했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인이 ‘육십 인생’이던 시절 스스로에게 각인(Imprinting)한 일종의 ‘괄호(括弧)’였다. 요컨대 나는 1970년생이고, 이 시간의 지정학(地政學)은 고정불변하다고 오해했던 거다. 나는 20세기와 21세기의 중간계(中間界)를 헤매는 느낌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며칠 전, 6·25전쟁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다가, 멍하니 충격을 받았다. 나는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 고작 17년 뒤에 태어난 것이다! 23년 전인 2000년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아! 내가 전후세대(戰後世代)구나!’ 이 깨달음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가 새로운 괄호를 설정하고 거기에 나를 집어넣자, 상황과 인식이 변했다. 잘 안 보이던 나 자신과 사회가 해석되기 시작했다. ‘자유 통일 수용 세대’라는 비전도 자연스러워졌다.
마찬가지로, ‘386적인’ 386들은 ‘군부 정치와 산업 근대화 후기(後期) 시대’의 괄호에 스스로를 집어넣어 ‘자진 삭제(self delete)’하는 게 옳다. 인간은 시대의 그릇에 담긴 ‘액체적 모순(liquid contradiction)’이다. 자기들만 고체 레고 조각처럼 그 시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딱 분리된다고 착각할 때 ‘정신 분열적 내로남불’이 인생 자체가 돼버리는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386은 알아야 한다. 당신들이 전두환을 미워했던 것보다 후배들이 더 당신들을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인의 어리석음이 그의 것인가 아니면 그가 속한 세대의 어리석음인가. 정답이 후자라는 것을 386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386 운동권 정치’를 퇴출시키겠다며 과거 운동권으로 ‘쎄게’ 살았던 이들이 ‘민주화 운동 동지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사라질 의무가 ‘사라질 권리’로 승화되길 기원한다. 이렇게 시간의 괄호를 사용할 줄 아는 양심가들이 늘어날수록 사기꾼들의 선량한 변장은 벗겨진다. 귀신이 도깨비와 적대 관계였다고 해서 그 귀신이 성령(聖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그런 잡귀들 천지다. 정체불명의 공격, 정체불명의 불행 같은 건 없다. 다 사람이 저지른 일이다. 증오하는 자와의 전쟁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이와의 전쟁은 비장하다. 그런데, 무지한 자들과의 전쟁은 환멸을 앓게 한다. 나를 포함한 386의 ‘새로운 괄호 그리기’를 응원한다. 환멸이 지옥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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