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학교폭력, 비밀은 없다
1990년대 전후로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에는 단체기합이 일상이었다. 선생님은 반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회초리로 허벅지를 한두 대씩 때렸다. 우등생도 열외는 없었다. 다 함께 벌을 받으면 공동체의식이 생긴다고 생각했을까.
시대가 바뀌어 교실 안 회초리는 사라졌다. 단체기합도 줄었다. 하지만 운동부는 예외였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도 운동부 내 체벌은 존재했다. 전통 있고 규율 센 운동부일수록 그 강도는 셌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20대 중반 이상의 선수들에게 “운동 관두고 싶은 때가 있지 않았냐”고 물으면 으레 “선배들에게 맞는 게 싫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감독이 선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행하던 물리적 폭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물림됐다.
SNS에 학교폭력 고백한 까닭은
최근 프로야구 케이티(KT) 위즈 외야수 배정대가 고교 시절 후배들에게 행한 폭력을 고백했다. 배정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성남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2년 대만 전지훈련에서 3학년 선배들의 주도로 단체 얼차려가 있었고, 2학년 주장이었던 내가 1학년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줬다. 배트로 엉덩이를 3대씩 때렸다”고 밝혔다. 보통은 불미스러운 일을 감추려 하는데 배정대는 스스로 활자화했다. 야구부 후배인 ㄱ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의 과거 학교폭력(학폭)을 폭로한 터라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ㄱ씨는 “배정대가 배트로 신체 부위를 여러 차례 가격하고 욕설했으며 모욕적인 언행을 했다”고 밝혔다.
배정대의 말은 다르다. 배정대는 “얼차려 후 후배들에게 사과했으며 이후엔 어떠한 폭행이나 욕설 하지 않았다. 운동부에 내려오던 악습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것에 관해 진심으로 반성하며 후회하고 있다”며 “올해 초 ㄱ씨는 구단에 연락을 취해 보상금을 요구했다. 수천만원에서 올해 연봉의 절반(1억7천만원)에 이르기까지 거액을 요구하는 등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세워서 합의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과거에 대한 둘의 기억이 달라서 한동안 진실 공방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배정대는 현재 정상적으로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프로야구 과거 학폭 이슈는 2020년을 전후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케이비오(KBO)리그 최고 토종 에이스인 안우진(키움 히어로즈)에게는 학폭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야구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휘문고 시절에 행한 학폭으로 국가대표에서 영구 제명돼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에 나갈 수 없다. 안우진의 경우 운동부 내 기강 잡기를 위한 행동이라는 생각에 학폭이 처음 밖으로 알려졌을 때 조금 안일하게 대응한 면이 없지 않다.
중학교 시절 학폭 때문에 1차 지명이 철회된 사례도 있었다. 지금은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김유성이 그랬다. 202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엔씨(NC) 다이노스는 1차 지명으로 지역 연고의 마산용마고등학교 오른손 투수 김유성을 지명했다. 하지만 당일 NC 다이노스 공식 SNS에 피해자 부모가 글을 남겨 중학교 시절 학폭이 드러났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NC 구단은 김유성 지명을 철회했고, 그해 어떤 팀도 김유성을 품지 않았다.
야구부 후배, 동기가 폭로
미국 프로야구 진출 등을 모색했던 김유성은 이후 고려대에 진학했고, 얼리드래프트(3·4년제 대학교 2학년 선수들이 프로 지명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신청해 2023년 신인드래프트에 나왔다. 그리고 두산 구단은 따가운 여론의 시선에도 2라운드 전체 19위로 그를 뽑았다. 김유성은 2023년 4월28일 에스에스지(SSG) 랜더스와의 경기로 프로 데뷔를 했다. 2023년 성적은 4경기 등판, 4이닝 투구 4피안타(2피홈런) 11볼넷 6실점으로 좋지 않다. 그가 등판할 때마다 ‘학폭’ 단어는 따라다닌다.
학폭 가해자로 몰렸다가 재판으로 억울함에서 벗어난 이도 있다. 이영하(두산)와 김대현(LG)은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시절 야구부 후배에게 행한 일로 특수폭행, 강요, 공갈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으나 둘 다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항소한 상태다. 배정대, 안우진, 김유성, 이영하, 김대현은 모두 야구부 후배 혹은 동기에 의해 학폭이 폭로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폭로 시점도 대중의 관심을 막 받기 시작한 때였다.
2023년 KBO리그 신인드래프트는 9월14일 열리는데 벌써 학폭 등 과거에 얽힌 말이 나온다. 대개 ‘○○○가 신인 지명되는 순간 중학교 시절 있던 학폭을 폭로한다더라’라는 소문이다. 김유성의 경우처럼 프로 지명이 된 순간부터 학폭은 학교가 아닌 구단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모그룹이 있는 구단의 경우 평판이나 이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프로 스카우트의 리포트에는 지명됐을 때 부정적 여론이 있을 수 있는 야구장 안팎의 아마추어 선수들의 사생활이 빼곡하게 적혔다. 참고로 KBO 사무국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있던 문제로 경기 출장 정지 등의 제재를 하지 않는다.
학교 안팎으로 폭력이 묵인되던 야만의 시대가 있었다. 20~30년 전 운동부 내 얼차려, 방망이 폭행 등이 폭로될 때 ‘그땐 다 그랬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단체기합 속 묵인됐던 폭력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식의 도돌이표가 이어졌다. 배정대의 경우도 11년 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조금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 또한 3학년 선배들에게 맞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학폭에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지만 해당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도 참고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프로선수’라는 공통의 목표 때문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련의 일로 야구부 내에서 자정 노력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요즘은 신체적 폭력보다 언어폭력이 더 심해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프로선수’라는 공통의 목표 때문에 야구부 내 폭행을 쉬쉬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폭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다. 어떤 시점에서 반드시 수면 위로 드러난다. 가해자는 기억을 못할 수 있지만, 피해자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게 학폭의 기억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평생 묻히는 비밀은 이제 없다. 야구선수나 연예인 같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직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오늘의 행위가 내일을 망치게 하지는 말자. 야만의 시대는 끝났으니까.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야구가 뭐라고> 저자
*김양희의 인생 뭐, 야구: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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