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버렸던 일본 경제, 어떻게 다시 뛰게 됐나[동아시론/이창민]
기업 구조조정 성공, 해외노동력도 적극 수용해
저성장 탈출 위해 이제 일본을 다시 배울 때다
사실 일본 경제는 금세기에 이미 두 번의 ‘저온호황’을 경험했다. 이자나미 경기(2002년 2월∼2008년 2월)와 아베노믹스 경기(2012년 11월∼2018년 10월)는 호황답지 않은 호황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 생산거점을 늘려가는 한편 환율 변화에 둔감해지면서 엔저와 수출의 상관관계는 희박해졌지만, 기업들이 손쉽게 환차익을 얻으면서 호황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해외에서 벌어 해외에서 투자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국내의 설비 투자는 감소하고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도 지지부진했다. 기업은 호황, 가계는 불황인 상태에서 일본 경제는 수치상으로는 호황이지만 국내의 투자와 소비가 늘지 않는 ‘저온호황’이 반복되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두 번의 호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감지되고 있다. 우선 기업의 설비 투자가 올해와 내년 2년 연속 역대 최고 수준인 100조 엔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글로벌 반도체 7개 기업에 투자 확대를 요청하고, 라피더스와 같은 신생 반도체 기업도 등장하면서 기업들의 국내 투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일본이 미중 패권 경쟁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는 형국이다. 경단련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이 앞다퉈 임금 인상을 결정하면서 명목임금 수준도 1997년 이후 26년 만에 최고 수준을 경신했다. 에너지와 원자재 등 비용이 견인하던 물가 상승 추세도 조금씩 수요가 견인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모처럼 활기가 돌고 있는 이웃 나라와 달리 우리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올해 1분기 한국의 GDP 성장률(0.3%)은 일본(0.9%)보다 낮았는데, 2분기에 그 차이는 더 벌어졌다(한국 0.6%, 일본 1.5%).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한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일본에 역전을 허용하게 된다. 일본의 총 GDP가 우리보다 2.5배 정도 크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덩치가 훨씬 큰 일본이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경우 반도체 수출이 부진에 빠지면서 수출 감소가 전체 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있는데,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의 피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반도체 산업이 변동성이 매우 큰 메모리반도체에 집중돼 있는 탓으로 봐야 한다.
늙어버린 일본 경제를 다시 뛸 수 있게 만든 것은 기업들의 변신이었다. 후발 기업의 추격으로 전자제품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소니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지금은 게임,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완벽히 부활에 성공했다. 거의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던 일본의 간판 전자기업 히타치 또한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지금은 인프라 기업으로 탈바꿈에 성공했다. 각성한 것은 기업만이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고도 출산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일본 사회는 당장에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실현 가능한 방법들부터 시작해 점점 사회적 합의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정년을 사실상 70세까지 연장한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재류자격을 만들어 사실상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이민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
불과 2년 전에 한일 역전이라는 말이 온 나라에 유행했다. 우리의 순위가 상승해서라기보다 일본의 순위가 하락했기 때문에 한일이 역전됐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일본을 이겼다는 사실이 달콤했다. 우리가 소위 ‘국뽕’에 취해 있는 동안 대만의 1인당 GDP가 18년 만에 우리를 추월했다. 그리고 올해는 일본의 성장률이 우리를 앞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고성장기의 일본은 우리의 정면교사였고, 저성장기의 일본은 우리의 반면교사였다.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한 일본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정면교사로서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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