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서명 후검토’의 나비효과… 군 뒤흔든 항명 사태[손효주 기자의 국방 이야기]
“장관의 서명에는 직위의 무게가 있는데 섣불리 서명해버린 게 아쉬운 부분이죠. 수사단장이 너무 나간 것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서명해버렸으니 그걸 뒤집으려면 수사단장을 잘 설득해서 순조롭게 진행했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예비역 대장 A 씨의 얘기다. 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아쉽다. 초기에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일을 왜 이렇게까지 키운 것인가”라고 했다.
이번 사태는 ‘선서명 후검토’가 불러온 참사나 다름없다. 지난달 30일 박 전 수사단장은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채모 상병 사망 경위를 수사한 보고서를 들고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 장관은 결재란에 직접 서명했다. 수사 결과 요약엔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관 예정’이라고 돼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장관은 돌연 경찰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초급 간부까지 범죄 혐의자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보고받을 때부터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 장관은 2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도 “보고받을 때도 하천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한 여단장 등이 왜 범죄 혐의자인지 질문했다”고 했다. ‘윗선’ 외압으로 하루아침에 명확한 이유도 없이 결정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는 것.
서명한 이유는 “해병대 수사단 차원의 조사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했다. 한 번에 이해가 가진 않지만 수사단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단 결재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찜찜하면 서명하지 않았어야 맞다. 이첩 보류가 아니라 서명을 보류한 뒤 충분한 법률 검토를 했어야 한다. 장관 서명의 무게를 생각하면 ‘예의상 서명’이나 ‘존중 차원의 서명’은 있을 수 없다. 수사단장은 보고 현장에서 이 장관이 의문을 보이면서도 정작 이첩 예정 등이 적시된 보고서를 최종 승인하는 서명은 했기에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통상 부하가 보고할 때 상관이 통과의례처럼 제기하는 의문 정도로 여겼을 수 있다. 오히려 조금의 지적도 없이 “완벽하다”고 칭찬만 하는 것이 부하 입장에선 더 불안할 수 있다.
서명부터 해버린 뒤 법률상 문제 여부를 검토한 ‘선서명 후검토’의 후폭풍은 거셌다. 수사단장은 이 장관이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등을 통해 명령한 이첩 보류는 정식 명령이 아니라며 보고서를 경찰에 이첩해버렸다. 이 장관과 사령관 등이 서명하며 결재한 문서상 명확한 명령이 있는데 이 외에 어떤 명령이 이를 대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군 수사기관 고위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수사단장의 행위는 군사경찰 조직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면서도 “다만 이 장관이나 김 사령관 등은 수사단장이 군사경찰의 자존심을 걸고 진행한 초동 수사 결과를 바꾸라고 지시할 때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지켜주며 이해시켰어야 했다”고 했다. 또 다른 예비역 대장은 “이첩 보고서에 장관 등이 서명했으니 수사단장이 ‘지금부터는 낙장불입’이라는 식으로 나온 것도 문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군내 상급자라고 해서 몰아붙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는 오히려 지시 불이행을 불러 사태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키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른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수사단장은 항명 혐의로 군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누군가 항명 혐의로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은 거꾸로 이 장관이나 김 사령관 등 수뇌부가 통솔력을 발휘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모두가 지는 수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가장 안타까운 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핵심이 항명으로 옮겨가면서 스무 살 청춘에 유명을 달리한 채 상병이 곁가지가 된 것이다. 사안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서 채 상병 순직 사건에서 정작 채 상병은 희미해졌다. 그가 순직한 지 이제 겨우 40일이 지났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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