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일제가 남긴 건축물을 바라보는 시선

2023. 8. 2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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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불 탄 희정당·대조전
이왕직과 조선총독부가 재건
일제가 이름만 흉내낸 건물을
정부가 보물로 지정해 씁쓸

1945년 8월15일, 태양이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여름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기쁨도 잠시, 우리 사회는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으로 한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갈등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좌우로 나뉜 이념, 친일 청산, 정치권력의 향배 등 신생 독립국이 마주한 난제는 한동안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다. 일제가 남긴 건축물의 처리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단연 한반도 지배의 사령탑이자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물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의 심장부에 일제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그대로 두는 것을 마뜩잖게 여겨 철거를 지시했으나 당시의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희망 사항에 그쳤다. 그 후 1962년 정부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중앙청’이란 이름을 붙여 정부청사로 활용하다가 나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하였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한동안 잠잠하던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는 1991년 경복궁 복원 계획이 발표되면서 다시 우리 앞에 불거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화문 바로 뒤 경복궁 안마당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두고는 경복궁 복원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두고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철거 찬성론자들은 경복궁의 원형과 민족 자존심 회복을 위해 경복궁 정면을 가로막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위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철거 반대론자들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좋든 싫든 역사적 증거인 만큼 반면교사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정에 못 이겨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반문화적인 행위일 뿐이라고도 했다.

일제가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에 침략과 지배의 상징인 총독부 청사를 세운 의도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화강암을 붙인 4층의 조선총독부 청사는 단층 목조 건축물로 가득 찬 경복궁 내의 기존 전각들에 비해 압도적인 매스(mass)를 자랑했다. 형태는 물론 규모에서도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의 건축 양식과 스케일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경복궁의 어떤 건축물도 으뜸 전각인 근정전보다 크거나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근정전을 가로막고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중앙 돔을 포함한 높이가 54m 정면의 폭이 128m에 이르러, 높이가 25m 정면의 폭이 54m에 불과한 근정전을 압도했다. 한양이 조선의 서울이 된 것은 궁궐을 세울 적당한 터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그곳에 경복궁을 세웠으니, 경복궁은 곧 서울의 근원인 셈이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시전의 위치를 정했으며 한양도성을 둘렀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대신해 서울의 역사적인 핵심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서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존함으로써 역사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일면 대범해 보이지만, 침략자의 상징을 서울의 얼굴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창덕궁에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두 전각 모두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각각 임금과 왕비의 거처로 창덕궁의 핵심적인 전각이라고 인정해 보물로 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전각의 내력을 조금만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원래의 희정당과 대조전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때 왕실의 보물도 상당수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우리가 보는 희정당과 대조전은 화재 후 조선 왕실의 살림을 관장하던 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이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1920년 새로 지은 것이다. 이왕직은 일본 왕실 궁내부 소속 기관이었으니 일제의 정부기관이었던 셈이다. 새로 지은 희정당과 대조전은 창덕궁의 옛 모습을 그린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원래의 희정당과 대조전과는 닮은 구석이 없는 전혀 다른 건물이다. 현관에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포치를 내밀고 창호지 대신 유리를 끼우고 마루에는 양탄자를 깔았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매단, 이른바 ‘조선식 외관을 가진 근대 건축물’이다. 정리하면, 1920년 일제의 정부기관인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이 자기들 임의대로 창덕궁에 지은, ‘희정당’과 ‘대조전’이란 옛 이름을 딴 건물을 65년 만인 1985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보물로 지정한 꼴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에는 어디인지 모르게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전각과 비교해 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가 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가 곧바로 어명을 내려 그해 9월에 완공한 주합루는 아래층에는 정조가 힘쓴 개혁과 학문의 산실이었던 규장각이 있었고 이층에 내건 주합루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정약용이 정조의 총애를 받아 이곳에서 일한 바 있으니, 주합루가 창덕궁에서 가지는 비중은 건축물의 연륜으로나 역사적 의미로나 현재 남아 있는 어떤 건축물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1985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가 1920년에 새로 지어 이름만 옛것을 흉내 낸 건물을 보물로 지정했으니, 결과적으로 주합루보다 낫다고 공인한 셈이다. 주합루는 2012년에야 보물로 지정되었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그 성격으로 볼 때 보물은 언감생심, 근대기 건축물에 적용하는 ‘등록문화재’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하필이면 광복절이 낀 8월 한여름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속에서 열불이 나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은 좁아터진 내 속 탓도 있으리라.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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