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냉전시대 최대 열전이자 세계질서 대전환점[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기자 2023. 8. 2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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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한국전쟁과 전후의 세계
한국전쟁은 6대륙 국가들이 모두 직접 참전한, 유례를 찾기 힘든 개별국가 전쟁이었다. 참전국가는 병력 참전 20개국과 의료 지원국 6개국을 포함하여 26개국에 달했고, 참전병사는 195만명 이상이었다. 직접 참전 대신 물자를 지원한 36개국까지 합하면 무려 62개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강대국들의 개입과 영향, 참전의 규모와 범위, 전후 세계질서 형성에 끼친 파급효과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대표적인 세계전쟁이었던 것이다. 사진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에티오피아·튀르키예·호주의 용사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국전쟁은 세계질서를 바꿔놓은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대표적인 세계형성전쟁·질서주조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전 세계적 규모로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 대 추축국의 대결구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결과 독일과 일본을 포함한 전범국가들은 한국전쟁 시기에 국제사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갈라졌다. 두 진영과 두 세계의 고착이었다.

당시의 주요 정책결정자와 관찰자들 그리고 훗날의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을 ‘사실상의 3차대전’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는 3차대전을 방지한 전쟁으로 불렀다. 왜 그런가?

우선 ‘3차’라는 말이 없더라도 한국전쟁을 왜 사실상의 세계대전으로 불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은 전쟁의 기원과 결정, 전개와 귀결 그리고 영향과 유산 모두에 걸쳐 세계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정에는 세계 공산진영의 대국 두 나라가 직접 관여하였다. 전쟁을 초래한 기원인 분단 역시 국제적 결정이었고, 전개 과정의 주요 국면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엔은 물론 미국·소련·일본·중국·영국이 모두 깊숙이 개입한 개별국가 전쟁은 이 전쟁이 유일하였다. 전후(戰後) 세계질서 형성에 끼친 파급효과의 측면에서도 사실상의 세계전쟁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방지한 세계전쟁이었다. 소련의 방혈전략에 의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통해 한국전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소련의 전면적인 충돌 가능성을 흡수·우회·통과하게 해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전쟁이 오늘날까지도 두 진영 간 최대의 전쟁인 ‘사실상의 3차대전’인 동시에 미·소 직접 충돌로 인한 ‘실제의 3차대전’을 방지한 전쟁으로 꼽히는 이유다.

또한 한국전쟁은 유엔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연합전쟁이자 집단안보전쟁이었다. 막 등장한 유엔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음으로 실질적인 세계평화 추구와 집단안보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유엔체제, 국제연합질서로 부른 전후 질서의 명실상부한 도래는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전쟁보다 더 성공적으로 유엔의 설립 목적과 역할을 수행한 경우도 없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두 진영과 국가들 모두 세계평화를 외쳤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을 계기로 자유주의 평화와 급진주의 평화라는 두 개의 세계평화기획이 본격적으로 대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으나, 유엔을 기준으로 볼 때는 유엔이 주도하는 평화와 유엔에 맞서는 평화로 구별되었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3차대전’이자 ‘실제의 3차대전’을 방지했다
또 그것은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연합전쟁이자 집단안보전쟁이었다

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중대 전환점

전후 국제정치를 좌우한 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전쟁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2차대전은 핵무기를 사용하여 끝냈으나 한국전쟁은 핵무기 사용을 제한한 전쟁 종식이었다.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머물고, 세계타협=정전협정 합의를 통해 세계대전으로 전화되지 않은 이유의 하나였다. 이는 승리를 위한 전쟁 수단의 무제한 사용의 자제를 의미한다. 5년 만에 인류가 핵을 사용한 ‘완승과 완패의 교환’, 이른바 ‘무조건 항복’의 추구에서, 핵 불사용을 통한 ‘조건적 타협’으로 크게 선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한국전쟁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심각하게 거론된 것 자체가 추동한 핵무기 개발 경쟁의 가속화 역시 중요하였다. 상호 절멸 수단을 갖는 공포의 균형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인류는 핵무기에 관한 한 이중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나아가, 최근 과학자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대에 시작된 수소폭탄 개발과 실험의 결과 급증한 플루토늄을 인류세 국제표준층서구역 선정의 가장 결정적인 지표로 채택한 바 있다. 국가안보와 세계평화를 위해 가속화한 핵무기 실험이 자연질서와 행성평화를 파괴하여 최악의 기후위기로 인한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를 여는 중심 표지가 된 것이다(물론 이 점은 한국전쟁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실질적인 참전의 범위와 규모를 보자. 한국전쟁은 6대륙 국가들이 모두 직접 참전한, 유례를 찾기 힘든 개별국가 전쟁이었다. 참전국가는 병력 참전 20개국-참전 당시에는 참전국가로 분류되지 않았으나, 훗날 주권국가가 되거나 독자 파견이 확인된 멕시코·수리남·아일랜드·일본 등 4개국 포함-과 의료 지원국 6개국을 포함하여 26개국에 달했다. 남북아메리카(미국·멕시코·캐나다·콜롬비아·수리남), 유럽(영국·네덜란드·그리스·벨기에·프랑스·룩셈부르크·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독일·이탈리아·아일랜드), 아시아(터키·필리핀·인도·태국·일본), 아프리카(남아프리카공화국·에티오피아), 오세아니아(호주·뉴질랜드)를 모두 포괄한다. 그중 멕시코는 1943~1952년 멕시코·미국 간 병역협력협정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참전하였으나, 멕시코 측은 현재 10만명 이상의 자국 병사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영국(5만6000명)의 거의 2배 규모로 미국(168만9000명)에 이은 제2의 참전 규모다.

26개국의 전체 참전 규모는 195만명을 넘는다. 직접 참전국가에 물자 지원국 36개국을 합치면 참여국가들은 무려 62개국에 달한다. 참전 가정과 마을들의 슬픔과 기쁨, 결혼과 가족사도 많은 부분이 한국전쟁 참전자의 사망과 부상과 생환과 함께하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한국전쟁의 소식과 전황은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였다. 한국전쟁은 세계의 전쟁인 동시에 세계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현재 부산에는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유엔기념공원)도 존재한다. 이곳은 세계평화를 위한 인류의 공동 연대, 공동 희생, 공동 추모, 공동 다짐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11개국 2320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전사자가 2250구로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사후 안장 등이다.

소련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위성체제에 가까웠던 공산진영 역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중국과, 공군 및 군사고문단을 참전시킨 소련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물자와 의료 지원에 나섰다. 한국전쟁은 참전과 연대와 지원 규모와 국가들 숫자는 물론 진영 상호 간의 적대성 및 진영 내부의 공고한 연대성에서도 희귀한 전 지구적 세계전쟁이었던 것이다. 자유 한국과 공산 조선을 돕는 것이 마치 자기와 자기 나라의 일이라도 되는 양 온 세계가 떨쳐 나섰던 것이다. 병력 파견, 의료 지원, 물자 지원을 포함하여 당시 주권국가 중 거의 80%에 달하는 국가들이 쌍방으로 참여한 전쟁이었다. 그중 압도적 다수는 조선이 아니라 한국 측으로의 참전이었다.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이토록 절대적 세계성과 연대성을 내장한 개별국가 전쟁은 없었다.

한국전쟁은 종교와 문명, 종족과 민족의 구별과 대결도 초월한 기묘한 전쟁이었다. 세계이념의 가공할 위력이었다. 한국전쟁에는 개신교·가톨릭·이슬람교·유대교·힌두교·불교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중에는 상호 갈등 중인 인접국가들도 있었고, 같은 종교일지라도 종파가 다른 국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는 갈등하였지만 한국, 그리고 한국과 자신들의 공통 가치를 지키는 데서는 하나였다. 참으로 특이한 전쟁이었다.

특히 미국과 서방이 주도하는 전쟁이었음에도 직접 참전과 물자 지원을 부담한 이슬람 국가도 한두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자유와 평화 기치 아래 인종과 문명과 종교의 갈등조차 이곳으로 전부 흡수하고 빨아들인 하나의 거대한 인류적 용광로이자 세계인의 집결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절대경계, 절대단층 한반도가 그만큼 세계 진영대결의 최전선이자 전방초소였다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정초한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해석은 깊은 주의를 요한다.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냉전’ 시대가 아니라 ‘열전’과 ‘냉전’의 ‘이중전쟁’ 시대였다. 이는 20세기 세계전쟁 통계를 보면 분명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세계전쟁 시대와 이중전쟁 시대의 전쟁 통계를 비교하면 매우 주목할 만하다. 10년 단위를 기준으로 할 때 1910~1949년과 1950~1989년을 비교하면 세계의 전체 전쟁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1910년대 25회, 1920년대 20회, 1930년대 19회, 1940년대 17회였다. 그리고 1950년대는 20회, 1960년대 25회, 1970년대 36회, 1980년대 23회였다. 오히려 더 늘었다.

전후 세계 대다수의 지역과 나라는 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질서는 ‘냉전’ 시대가 아닌 열전과 냉전의 ‘이중전쟁’ 시대였다

20세기, 냉전시대로 규명은 잘못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유럽(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과 미국·소련·일본은 자기 영토에서 더 이상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포함하여 세계전쟁의 핵심 국가들이자 대륙이었다. 그러나 1945~1950년을 기점으로 전쟁 지역과 국가는 유럽·소련·미국·일본에서, 동남아·동북아·아프리카·중동·남아메리카로 확연하게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후자 지역은 냉전이 아니라 열전 상황이었다. 세계전쟁 시대를 마감한 한국전쟁은 이중전쟁 시대라는 또 다른 세계사적 시대를 연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냉전·냉전시대라는 잘못된 명명으로 인한 20세기 세계사에 대한 곡해를 다시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유럽·미국·소련·일본을 제외하면 영토·국민·국가를 기준으로 직접 전쟁에 연루되지 않은 나라와 대륙은 많지 않았다. 그 점에서, 관용적으로는 몰라도 사실에 비추어, 당시 세계를 ‘냉전’과 ‘냉전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중동·동남아·동북아·아프리카의 수많은 지역과 나라와 종족들은 ‘열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시기를 냉전, 또는 냉전시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오래전부터 반대해왔다. 세계 대다수 사람과 지역과 나라는 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과 냉전시대라는 명명은, 소수의 대국과 선진국들이 냉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하여, 그들 중심으로 세계 전체를 해석하는 오류인 것이다.

요컨대 한국전쟁이 초래한 한 역설은 전쟁대륙 유럽에서의 긴 전쟁역사의 종식이었다. 그것은 서유럽과 동유럽, 서독과 동독 사이의 평화적 분단을 고착시킨 계기였다. 한반도에서 무력통일을 시도한 스탈린은 한국전쟁 시기 동안 독일에서는 수차에 걸쳐 평화통일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의 분열과 각각의 내부 단결은 더욱 강고해졌다. 그러나 독일 문제는 한반도 문제와는 반대로 상호 전쟁이 없는 분단으로 인해 두 분단국가 간의 적대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다. 유럽과 아시아 진영대결의 중심인 독일 분단과 한반도 분단의 성격을 가른 계기는 전쟁의 유무였던 것이다. 이 차이는 훗날 둘을 각각 통일 성취와 분단 지속으로 갈라지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한국전쟁이 유럽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안정과 평화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유럽평화의 정초 역할은 이후 이중전쟁 시대가 종식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세계 두 진영 사이의 첨예한 대결 압력의, 한국전쟁을 포함한 유럽 밖에서의 폭발과 분출구 역할로 인해 이중전쟁의 중심 진앙이었던 서구와 소련의 충돌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통제·관리·방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곳은 ‘차가운 전쟁’(cold war) 대신 ‘차가운 평화’(cold peace)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비롯한 다른 곳의 열전이 유럽에 긴 평화를 제공한 것이다. 방혈, 즉 ‘타인의 피로 인한 평화’라는 압력의 분출 효과 때문이었다. 이중전쟁 시대의 가장 잔인한 현상이었다.

그 점에서 한국전쟁은 30년전쟁과 비교된다. 30년전쟁이 종교전쟁을 통해 유럽질서를 구획하였다면 한국전쟁은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세계 이념전쟁을 통해 세계 진영을 구획하였던 것이다. 이후의 파상(波狀) 효과 역시 같았다. 20세기에는 세계 이데올로기가 세계 종교였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을 유럽사의 30년전쟁에 유비하는 것은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세계 곳곳의 복합적인 토착 갈등들을 거의 대부분 일반화하고 일률화하였다.

복잡다기한 인간존재의 양태와 사유의 다양한 모습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중도와 중간도 거의 실종되었다. 제3세계라는 용어는 한국전쟁 시기에 처음 등장하였으나, 이 전쟁 이후 제3세계 탈식민국가들의 국가 수립과 민족주의 운동조차 세계 급진주의와 세계 보수주의가 침투하여 날카롭게 갈라놓았다. 온 인류가 세계 이념대결의 질곡에 빠져든 것이었다. 거의 모든 토착적 갈등들에 두 일반 이념이 밖으로부터 덮어씌워지는 세계 이데올로기 대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세계 자유·공산진영이 충돌한 최초이자 최후 전쟁
세계 각국 국내 정치지형과 자원 배분에 끼친 영향도 결정적이었다

세계 이데올로기 대결 시대 도래

그리하여 세계 각국의 국내 정치지형과 자원 배분에 끼친 영향도 결정적이었다. 한국전쟁은 세계 자유진영과 세계 공산진영이 단일대오처럼 충돌한 최초이자 최후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후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빌미로 모두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로 전락하였고, 자유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명분으로 냉전자유주의로 폐색되었다. 공산주의로부터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거의 사용되지 않던 언어인 국가안보 개념의 본격적인 등장과 고착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주요 국가들은 전형적인 안보국가로 변전되었다. 이후 국가안보는 세계 모든 국가의 가장 표준적인 준거이자 최고 지표가 되었다. 인민과 민족과 계급 해방을 명분으로 등장한 공산주의 체제들은 체제 수호를 위해 인민과 민족과 계급을 혹독히 탄압하는 전체주의로 전락하였다.

종교전쟁의 시대에 해당 지역에서 세계 보편종교, 단일종교가 갈등의 기축 역할을 수행하였듯, 이중전쟁 시대에는 세계 이데올로기가 중심 기준점으로 작용하였다. 마을도 민족도, 부족도 혈통도 심지어 가족과 친지도 일단 이데올로기로 갈라지면 두 세계 전체의 대립 수준을 넘는 분열과 증오, 폭력과 투쟁이 높고 컸다. 전술했듯, 그리고 인류가 반복해서 보여주었듯, 민족과 종족을 포함하여 동질적인 인간집단일수록 다른 이념과 종교와 종파를 갖는 내부 집단은 이단과 세균, 괴뢰와 주구로 간주하여 가공할 절멸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념의 전사들이 유일 교의에 집착하는 사례를 세계사는 너무도 많이 보여준다.

인류는 이념전쟁 이전에도 크고 작은 많은 전쟁과 내전을 치러왔다. 그러나 종교전쟁과 이념전쟁 시대처럼 단일한 일반성이 전 대륙과 전 세계를 이리 광포하게 휩쓴 적은 없었다. 특별히 한반도가 세계 어느 곳보다도 시대착오적인 이념대결의 동굴에 아직도 갇혀 있다는 점은 아무리 깊게 성찰해도 부족하다.

■필자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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