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감옥만 여덟 번째인 최인기를 기억하며

기자 2023. 8.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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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삶의 날들이 있다. 2007년 10월11일 밤도 그렇다. 그 밤 고양시에서 한 노점상이 도심 나무에 목을 걸었다는 짧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아내와 함께 주엽역 근처 문화초교 앞에서 12년 동안 붕어빵과 순대와 떡볶이와 달고나 등을 팔던 이근재님이었다. 오후 10시쯤 좌판 리어카를 끌고 집에 돌아갈 때면 호주머니에 6만~7만원이 남았다고 했다. 전날인 2007년 10월10일 오후 2시. 고양시내 500여 노점상을 거리에서조차 내몰기 위해 31억원의 거리정화 예산을 배정한 고양시청이 300여명의 용역깡패를 트럭에 싣고 나타났다. 나와 있던 경찰은 저항하면 공무수행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했다. 노점 좌판이 부서지고 아내가 차디찬 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울부짖는 것을 봐야 했다.

송경동 시인

“여보, 미안해, 여보, 미안해. 당신의 붕어빵틀을, 순대를, 떡볶이를, 도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대학생인 두 아이가 알게 될까봐 울 수도 없던 밤. 다음날 새벽 4시30분. 날일 찾아 인력소개소 간다며 나갔던 이근재님은 캄캄한 도심 산책로변 나무에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자신의 가난한 삶을 내걸었다.

그 밤을 꼬박 새워 청탁받은 바 없는 한 편의 추모시를 울면서 썼다.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붕어빵 아저씨 고 이근재님께 드리는 시’였다. 오후 1시쯤 깨어나 보니 기고해 둔 시가 수많은 소셜미디어(SNS) 커뮤니티에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되며 일명 ‘사회적 여론’이란 것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여론에 기운을 얻은 노점상들이 고양시청 정문을 뜯어내며 50여명이 다치고 14명이 연행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곧이어 70여개 사회단체가 ‘고 이근재님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사회적 투쟁에 나섰다. 2007년 11월9일, 27일 만에 정부와 고양시청은 고인에 대한 사과와 폭력적인 노점 단속 중지, 노점상들과 성실한 협의 등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권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을 축으로 진행되던 전국 노점상 탄압을 중단시키는 항쟁의 한 매듭이었다.

그 장례식이 열리던 날. 최인기 동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장례식 중인데 그 시 한 편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고, 고맙다고 했다. 덧붙여 영결식 끝내면 누군가는 또 법적 책임을 져야 해서 출두하기로 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이근재 선생님 잘 가세요.’ ‘최인기 동지, 수고했습니다.’ 이겼다는데도 왜 그렇게 뜨겁게 목이 메던지. 자본과 권력, 소수 특권층과 자산가 일부의 무한한 자유와 안전, 안락을 위해 죽거나 끌려가야 하는 이들의 고난이 서럽던 날이었다.

16년이 흐르고 난 2023년 2월10일, 오전 10시28분. 여전히 헌신하며 빈민해방실천연대 수석부위원장 등으로 일하고 있는 최인기 동지가 페북에 짤막한 글을 남겼다. “실형 … 받았습니다. 잘 쉬는 것도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할 일은 많습니다. 열심히 사색하고, 부족한 내용 채우고 돌아오겠습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2년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되며 급하게 남긴 소식이었다.

2014년엔 세월호만 침몰당한 게 아니었다. 그해 국정교과서는 이미 침몰당했고, 노동3권이 침몰 위협 앞에 있었고, 진보정당과 전교조는 법외로 내몰리고 있었다. 1만여명의 문화예술인과 사회 각계의 많은 이들이 블랙리스트로 관리되었다는 것도 촛불항쟁 이후 밝혀졌다. 그 당시 대부분의 도시 빈민들도 차별과 폭력, 죽음 앞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 2014년 서울 강남구청의 무자비한 노점 단속에 맞서 연대했다는 이유가 최인기씨와 그의 동료 다섯 명이 9년에 이르는 사법탄압 후 실형 2년씩을 받고 법정구속된 까닭이었다. 당시 강남구청도 32억원의 거리정화 예산을 배정하고 수백명의 용역깡패들을 동원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최인기씨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대중적인 도시 빈민운동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선 후 30여년 동안 그 설운 바닥을 떠나지 않고 헌신해온 우리 시대 ‘숨은 의인’이며 진짜배기 민주투사다. 그 과정에 일곱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지만 변함없던 사람. 차별 없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희망하는 이들의 필독서가 된 <가난의 시대> <그곳에 사람이 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의 도시> 등 네 권의 르포집과 기록사진집 <청계천 사람들> <노량진 수산시장> 등을 펴낸 부지런한 거리의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관되게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도시 빈민 등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며 “무인도에서 유리병에 글을 담아 띄워 보내는 절박한 심정으로” 쓰니 부디 함께 기억해달라고 했다.

사법탄압·검찰탄압 규탄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의제인 양 갖가지 내로남불들을 부끄럼 없이 상호 시전하며 떠들어대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살며 사회의 정의를 인양하기 위해 헌신해온 최인기씨와 그의 동료들의 구속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 씁쓸해 다시 ‘이건 아니지 않냐!’고 밤새워 써보는 길고 긴 편지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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