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선택적 배제와 정체성, 반공? 그러면 친일도?

기자 2023. 8.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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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란을 문제 해결 지향적으로 풀기 위해선 정부가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공론의 장을 조성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 파동 때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 독립운동사를 말하려는지 정부 스스로 밝혀야 한다
지금처럼 다짜고짜 반공을 선택하고 항일을 배제하는 선택적이고 적대적인 기념 방식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만 일으킬 뿐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군에 대한 연구를 막 시작한 때인 2001년 만주국군에서 근무한 조선인 장교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일본의 위성국가인 만주국에서 근무한 조선인 군인에 관해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아직 논문이 발표된 적이 없는 때라 전체상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관련 자료조차 한국에 거의 없어 일본과 중국에 가서 하나하나 새로 확인해야 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우선 부딪쳐 보기로 했다. 이때 길 안내를 받은 책이 만주국군 출신 한국인들의 회고록이었다. 겸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한국인의 회고록도 모았다. 만주국군 출신자 가운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3·4학년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간도특설대, 친일과 반공 응집체

그런데 양측 출신자들의 회고록을 쭉 읽어 내려가는 도중 독특한 비교점이 눈에 띄었다. 일본 육사 출신자들의 회고와 달리,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이나 독립정신과 연관시켜 장교가 된 이유를 언급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언급한 회고는 없었다. 또 중국공산당 소속 팔로군과의 싸움이나 만주에서의 ‘공비 토벌’을 들며 반공을 강조하고 그것이 민족을 위한 행위였음을 하나같이 강조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소속이 일본 육군이든 만주국군이든 일본 제국주의와 자신의 미래를 같이하겠다고 선택한 직업군인이었다.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가운데서 양자 간의 미묘한 차이를 확인하니 나름 흥미로우면서도 ‘왜 이렇게 써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은 특히 간도특설대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풀려갔다. 간도특설대 설치는 만주의 대표적 친일파로 간도성장(間島省長)에 재직 중인 이범익이 만주국 정부에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당시 백계(白系)러시아인으로만 구성된 특설 부대가 1937년에 이미 결성돼 있었으니 낯선 정책은 아니었다. 만주국은 1938년 9월 조선인의 ‘애국적 자각심과 협력심을 결집’하고자 간도특설대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간도특설대는 장교 몇몇을 제외하면 병사들까지 모두 조선인이었으니 조선인만의 특수 부대였다.

그럼에도 왜 1938년 시점에 이범익이 건의하고 관동군이 통제하는 만주국 정부에서 실행했을까. 그것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에 이 전쟁은 물자와 사람을 총동원하는 체제를 갖춰야 도전이 가능하다는 현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총독부도 여기에 조응하는 정책의 하나로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그해 6월부터 제1기생을 훈련소에 입소시켰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를 침략한 직후 이미 100만명이 넘어선 군대를 편성하고 있을 만큼 팽창하고 있어 가까운 미래에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할 징병제에 대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특별지원병제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청년을 특별지원병자로 간주하지 않는 제도였다. 오히려 만주의 조선인은 만주국의 오족협화 이념에 따라 일본인, 만주족, 몽골족, 한족과 협화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간도특설대는 협력심을 한데 모을 결집체였던 것이다. 동시에 간도특설대는 부대가(部隊歌)에서처럼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 부대’이기도 했다.

간도특설대가 오족협화와 천황의 뜻을 구체화한 공간이 북간도 지역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1939년 7월까지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대원을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재만한인 대부분이 거주하는 이곳에 배치했다. 부대의 본부도 백두산 자락 바로 밑에 있는 안도현 명월구에 두었다. 조선인 대원이 많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그중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제2군 6사의 주요 활동 지역이 안도현을 포함해 백두산 일대였기 때문이다. 실제 1941년 4월까지 북간도 지역의 항일 유격대와 간도특설대 사이의 전투가 확인된다. 반면에 간도특설대가 북간도 지역에 배치되기 시작할 당시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무장대, 곧 ‘독립군’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계속 저항하는 항일 유격대에 관동군은 진드기 전법으로 대응했다. 1940년쯤에 이르면 항일 유격대는 부상자가 속출한 가운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했다. 유격대의 조직적인 항일 무장투쟁이 사실상 끝난 것이다.

그러자 간도특설대는 1944년 초 러허성(熱河省)으로 이동해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싸웠다. 이때 운영한 정보반이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또 1945년 들어서는 많은 조선인이 이주해 살고 있던 허베이성(河北省)에서 팔로군과 싸웠다. 간도특설대는 북간도에서처럼 두 곳에서도 팔로군 이외에 민간인을 죽이거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 반일과 반공의 기억 방식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백선엽도 러허성에서 팔로군 등과 싸웠다. 그는 1993년 일본에서 간행한 회고록에서 “우리들이 추격한 게릴라 가운데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고 밝혔다. 비록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말려든’ 결과였다며 피동적 선택임을 변명했지만, 그는 자신을 포함한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탄압을 인정했다. 그래서 “동포에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백선엽의 자기 고백은 국내의 한글 회고록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더구나 올해 들어 백선엽의 반공 업적을 띄우면서 친일 행적을 비롯한 여러 과오를 지우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운동가 5인(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이회영)의 흉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백선엽 등의 흉상을 세우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흉상을 옮겨 독립운동을 부정하려 한다는 비판에 대해 ‘균형 잡힌 역사교육’이란 측면에서 ‘이전’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국난 극복의 전체 역사에서 특정 시기에 국한된 독립군·광복군 흉상들만이 사관생도들이 매일 학습하는 건물의 중앙현관 앞에 설치돼 있어 위치의 적절성, 역사교육의 균형성 측면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특히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소련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는 홍범도 흉상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흉상을 옮기겠다는 것이지 없애려는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난 극복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한정되어 있다는 지적 자체는 타당하다. 하지만 국난 극복사의 측면에서 어느 분의 흉상을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는 이상 국방부의 설명은 말로 포장하기에 불과하다. 또 ‘최적의 장소’로 옮기겠다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적절한 곳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독립기념관조차 이미 김좌진의 동상이 있는 데다 홍범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시·어록비가 경내 어딘가에 각각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어록비가 이미 106기나 들어서 있어 이제는 독립기념관의 경관에 부담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국방부는 또 하나의 대안으로 “육군 또는 육사의 창설, 군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흉상 설치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흉상 설치 기준을 반공과 한국전쟁으로 국한하겠다는 뜻으로 국난 극복의 전체사와 연관성이 약하다.

결국 정부의 이번 계획은 흉상 이전이 아니라 흉상 철거이다. 어떤 명분을 갖다 대든 인물로는 홍범도가 타깃이며, 1960년대 후반에 정립된 의병-임시정부-독립군-한국광복군-국군으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정신의 역사성을 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헌법에 입각해 광복과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흐름과 따로 가고 있는 국방부의 관성화된 역사인식의 표현이다.

이번 논란을 문제 해결 지향적으로 풀어가기 위해서는 비판을 ‘괴담’으로 치부하지 말고 정부가 먼저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공론의 장을 조성해야 한다. 더 나아가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동과 2015년 국정교과서 파동 때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 독립운동사를 말하려고 하는지 정부 스스로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다짜고짜 반공을 선택하고 항일을 배제하는 선택적이고 적대적인 기념 방식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만 일으킬 뿐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체성, 곧 일관성을 흔들어 개인의 자존감과 집단의 연대의식에 내재한 살아 있다는 느낌에 혼돈을 초래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힘도 약화시킬 것이다.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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