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DNA’ 사건은 왜 일어났나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5년 전 한 건강서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다. 워낙 화제라 읽어보았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이 거의 없었다. 혈압약을 먹으면 치매가 생긴다, 항암치료는 효과가 없다 등 어처구니없는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가는 누군가 큰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보건복지부, 대한의사협회, 언론에 제보했다. 복지부는 단속 근거가 없다며 경찰로 공을 넘겼다. 경찰은 피해자가 없으니 조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의협은 사이비를 순교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며 무대응 전략(?)을 내세웠다. 언론사들 역시 피해자가 없으니 기사화하기 어렵다 했다. 말인즉 모두 옳다. 하지만 뭔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사후 수습보다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다. 사고가 나야 손을 쓸 수 있다니, 반드시 누군가 피해를 봐야 한다는 것인가?
그사이 언론은 대단한 철학이라도 전하는 양 앞다투어 그 책을 대서특필했고, 유수한 기업들이 권장도서로 선정했다. 책은 아직도 잘 팔린다. 저자는 이후 미국에서 환자를 보지도 않고 허위로 진료비를 청구해 사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면허가 취소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건강전도사’로 추앙받는다. 이쯤 되면 사이비 종교가 무색하다.
그 책이 출간되기 약 5년 전, ‘안아키’가 ‘자연주의 육아법’으로 부모들을 현혹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왕의 디엔에이(DNA)’ 사건이 터졌다. 대략 5년 간격으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참담하다. 이번 일도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반짝 관심을 끌고 잊힐 것이다. 세 사건의 몸통은 사실 하나다. 모두 ‘과학적 시각이 결여된 사회’라는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과학적, 반지성적 태도는 의료를 크게 왜곡시켰고, 이제 교육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왕의 디엔에이’는 자폐, 틱장애,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어린이를 약물 없이 완치한다고 주장해 절박한 부모들을 착취하는 데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런 사이비들의 폐해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강력 대처란 말은 공허하다. 유관기관들은 피해자가 없다면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폐 어린이의 부모 등은 왜 저런 곳을 찾아갈까? 자폐는 빨리 발견할수록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 문제는 조기 진단받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아기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는 소아청소년과를 찾아간다. 이때 소아과 의사는 소아정신과에 가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소아정신과에 예약하면 6개월에서 1년 뒤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두살 이전에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1년을 기다린단 말인가? 부모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이렇게 절박한 사람일수록 사이비에 빠지기 쉽다.
서구 선진국들은 어떨까? 자폐를 비롯해 어린이 발달장애와 정신과적 문제는 우선 소아과 의사가 진단한다. 물론 필요하면 소아정신과에 의뢰하지만, 소아정신과 의사를 만나기 전에 바로 치료를 시작한다. 이런 제도가 얼마나 편리하고 합리적인지 생각해보자. 소아과 의사는 부모와 어린이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의료인이다. 감기든, 예방접종이든, 영유아 검진이든 소아과를 찾을 일은 너무나 많다. 그 자리에서 자폐나 에이디에이치디를 바로 진단받고 대책을 세우면 어떨까? 진단을 받은 뒤에도 아이 상태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어떤 치료가 더 필요하고, 무엇이 도움되지 않는지 판단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야 부모들이 어찌할 바 모르다 상업적인 사이비에 속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소아과가 구심점이 되어 소아정신과 의사와 소통한다면 ‘정신과에 다닌다’는 낙인도 피할 수 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소아과 의사보다 더 적임자는 없다.
제도를 고쳐 소아과 의사의 교육을 강화해 어린이 발달, 행동, 정신적 문제에 대처하자.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올 때 헤쳐갈 방법은 어둠에 ‘강력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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