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어느 판사의 고민…그저 과거라 말할 수 있나

한겨레 2023. 8. 2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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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불안과 공포 분위기에 빠지면 권력은 대중을 마음대로 부리기 좋다.

사상이 불건전하거나 범죄의 위험성이 있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를 들어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끌어올리는 분위기다.

부역자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는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급하게 만들다 보니 내용이 제대로일 리 만무하다.

판사 잘못 만나면 비명횡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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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이상훈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변호사

대중이 불안과 공포 분위기에 빠지면 권력은 대중을 마음대로 부리기 좋다. 유언비어는 난무하고 집단 이성 마비에 빠진다. 극단적 주장도 잘 먹힌다. 히틀러의 나치당도 당시 독일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최근 사회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사상이 불건전하거나 범죄의 위험성이 있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를 들어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끌어올리는 분위기다. 의도적이 아니길 바라면서 공포가 최대치이었던 한국전쟁 당시의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법조인도 잘 모르는 긴 제목의 대통령 명령. 전쟁이 나자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급하게 만든 긴급명령이다. 부역자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는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급하게 만들다 보니 내용이 제대로일 리 만무하다.

우선 형량이 세다. 일단 부역행위로 분류되면 무조건 사형, 무기, 10년 이상의 징역이다. 주범이 아니라 공범도 똑같이 처벌한다. 단심제이고 단독판사가 40일 안에 신속하게 판결한다. 판사 잘못 만나면 비명횡사할 수 있다. 증거는 생략할 수 있다. 나중에 판결문을 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빨갱이를 동정하는 자 역시 빨갱이라는 전쟁통의 특수한 여론 상황이지만, 너무 비이성적이다.

당시 서울지법 판사였던 유병진(1914~1966) 판사는 ‘재판관의 고민’ 책에서 복잡한 인간적 고뇌를 토로했다. 그는 전쟁에서 자신의 3살 아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김일성과 부역자들은 원수이고 보복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심정을 기술했다. 그러면서도 허술한 특별조치령으로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것에 대한 판사로서의 고민 또한 자세히 기술했다(구체적 사례는 8월14일치 한겨레 기사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⑮’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를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1952년 9월 헌법위원회(현 헌법재판소)는 단심제 조항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다만 나머지 조항은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판결을 모두 무효로 할 수 없었다. 국회는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을 정식으로 제정해 단순 가담이나 행위의 불가피성 등으로 형의 감경이나 면제가 가능하도록 합리적으로 조정했다. 문제는 종전의 판결을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정부가 관리하던 자료에 따르면 특별조치령으로 처벌된 사람은 1만3703명일 정도로 많았다. 오랜 논의 끝에 재심의 기회를 주는 내용의 피해자구제법을 제정·공포했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재심 절차를 막았다. 증거와 증인이 남아 있던 그 때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지만, 시기를 놓쳤다.

수십 년의 질곡 진 시간이 지난 지금 많은 유족이 진실화해위원회에 피해구제를 호소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요즘 유병진 판사의 고민을 이어받아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 예컨대 ‘주문 사형’이라는 잔인한 4글자의 판결문이지만, 범죄 사실은 북한군에 군량미 제공을 방조했다는 것이고 어떻게 방조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행위를 한 자를 구제하려고 해도 판결문만으로는 그러한 사정들을 알 수 없다. 아예 판결문이 없는 경우도 많다.

위원회에서 조사 중인 사건을 보면 돈과 권력 대신 가족과 평온을 선택하며 살려고 해도 잘못된 시대의 조류를 만나면 개인의 작은 희망들이 무참하게 망가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진보·인권으로 위장한 공산 세력 패륜공작’이라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지금 필요한 시대의 조류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정치 지형이나 불안과 공포가 높아지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다. 최소한의 주거와 소득,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 바로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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