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없고 돈 없는 사람도 솔깃해할 만한 정원의 묘미 있죠”
그는 ‘정원주의자’다. 직업이 조경 전문가여서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사랑해서만도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현재 우리가 풀어야 할 정서적 난제의 실마리가 정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원의 쓸모는 눈을 쉬게 하는 녹색공간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다. 치유와 안식, 만남과 소통, 돌봄과 나눔이란 정원의 본질적 가치야말로 사회적 고립, 관계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그는 믿는다. 성종상(58·사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가 정원을 사랑한 동서양 명사 12명의 삶을 다룬 ‘인생정원’(스노우폭스)을 낸 이유다.
스위스의 산자락 몬타뇰라에서 정원을 가꾸며 여생을 보낸 헤르만 헤세, 국화꽃 그림자만으로도 정원의 흥취를 만끽한 다산 정약용, 자연탐구와 식물학 연구의 공간을 애정한 괴테, 정원을 경관의 일부로 풀어내고 이를 배움의 터전(도산서당)으로 삼은 ‘풍경철학자’ 퇴계 이황, 창덕궁 후원에서 각종 연회 등을 통한 신료와의 소통으로 왕권 확립을 도모한 정조대왕, 산수 원림을 정원으로 삼은 ‘늙은 가짜어부’ 윤선도 등등. 이들 상당수는 뛰어난 성취를 이뤄낸 인물들이었지만 우울증(헤세),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정조), 스트레스와 부담감(처칠), 불안정한 정치적 위상(찰스 3세) 등 내적인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정원은 이들의 지친 영혼을 품어준 안식처였다.
“서울 성북동 저택에 가보면 세련된 디자인에 정원사가 솜씨 좋게 가꾼 정원이 많죠. 하지만 그렇게 남들이 가꿔놓은 아름다움을 즐기는 건 정원을 누리는 1차원적 행동이에요. 밭을 갈면서 마음을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스스로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 정원을 진짜 즐기는 방법이죠.”
정원서 우울증 등 내적 고통 해소한
헤세, 정약용 등 동서양 12명 삶 다뤄
“단출해도 나만의 공간서 안정감 누려”
사회적 고립, 관계 단절의 실마리가
정원에 있다고 믿는 ‘정원주의자’
집합주택 외부공간 주민 활용 제안
“텃밭 운용한 아파트, 이웃간 좋아져”
한국 전통 조경 연구자로서 한국인의 오랜 삶과 문화를 살펴온 성 교수는 공간 설계에서도 시간과 역사의 무게를 중시해왔다. 선유도공원 설계를 총괄하며 정수장이란 근대적 산업 공간을 ‘시간의 정원’ ‘물의 정원’이란 시적인 테마로 풀어냈다. 순천만국가정원박람회 마스터플랜을 짠 이후 정원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정원사 양성 교육 등을 통해 시민들의 일상에 정원 문화가 녹아들길 바랐다.
이런 맥락에서 성 교수가 ‘인생정원’에서 다룬 정원 대부분이 단순하고 밋밋한 디자인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에 가보면 ‘애걔, 이게 뭐야’라고 할 사람 많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다산초당을 이상적 거처로 생각했어요. 다조(차 끓이는 부뚜막 용도의 바위), 약천(샘물), 정석(자신의 성(姓)을 새긴 바위), 석가산(연못 한가운데 만든 작은 바위산) 등 이 정원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이름 붙이고 애지중지했어요. 단출한 공간이었지만 풍부한 의미화를 통해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었죠. 헤세의 정원도 인위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대신 주위 풍광이 빼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사대부와 비슷해요. 낙동강변, 청량산 주변을 오가며 사색했던 퇴계 선생처럼 헤세도 정원 안팎을 수시로 산책하며 감상했지요.”
성 교수는 “토머스 제퍼슨 같은 이들은 식물과 정원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며 “정원 가꾸기는 좋은 삶, 근사한 삶, 선한 삶이라는 공감대 속에 외국에선 조경가뿐 아니라 철학자·미학자·심리학자·사회학자 등이 정원을 주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원이 이렇게 좋은 것이라면, 정원을 만들 땅도, 돈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일단 한국인 50%가 살고 있는 집합주택 외부 공간을 텃밭 정원 등 주민들이 일상을 함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땀 흘린 만큼 수확하는 재미가 있는 텃밭을 만드는 게 제일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제 대학원 제자가 박사 논문을 쓰면서 텃밭을 잘 조성한 용인의 한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텃밭을 오래 이용한 주민들은 이웃 관계가 매우 촘촘하다는 걸 확인했어요. 작물을 같이 가꾸고 먹거리를 나누면서 매우 가까워지는 거죠. 이웃 사이가 좋아지면 층간소음에 칼부림하는 일이 생기겠어요?”
그는 땅 없고 돈 없는 사람이 솔깃해할 만한 한국 정원의 묘미를 들려줬다. “한국은 뒷산이 담을 스멀스멀 넘어오면 정원이 되고, 정원이 스멀스멀 넘어가면 자연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계를 짓고 배타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조선 선비들이 전국 곳곳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 이름을 지으며 즐긴 것처럼 우리도 주변 산과 강을 정원처럼 대할 수 있어요. 우리는 행복을 살 순 없지만 행복을 찾을 순 있을 테니까요.”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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