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목 칼럼] 사법개혁은 새 대법원장의 역사적 소명
김명수 대법원장이 9월 24일 퇴임한다. 후임으로 이균용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지명됐다. 대통령실은 "원칙과 정의, 상식에 기반해 사법부를 이끌어갈 적임자"라는 설명이다. 이 후보자 또한 사법 신뢰 회복과 재판 권위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언급했다.
지난 몇년간 정치권이 좌우, 보수·진보 대결 구도로 급속히 나아가자 사회 전 분야에서 소통과 타협은 사라졌다. 정책수립과 사회 의제 설정이 정치적 극단대립으로 치달으니, 법원의 판결로 그 방향성을 확정하려는 시도가 급증했다. 법관 인사를 좌우하고 법관을 곧바로 정치권으로 영입하면서까지, 사법부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권의 시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이런 환경은 오히려 법원의 권위를 수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국의 현대 사법사에서 가장 큰 갈등 중의 하나는 정치권력과의 관계, 그 중에서도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사법부가 설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초대 사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개정노력에 반대하고, 국회 프락치 사건, 윤재구 의원 횡령 사건 재판 등에서도 대통령의 권력에 맞섰다. 집권연장을 위한 발췌개헌을 거스르는 법원 판결에 대해 대통령이 비난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이 "억울하면 절차를 밞아 항소하시오"라고 대응한 일화는 사법부 독립의 상징이 됐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종 문제, 경찰 공권력 문제 등의 민감한 정책사안에 대해서도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이 이끄는 미국 대법원은 사법부 독립의 길을 걸었다. 대통령의 압력을 극복하고 학교에서의 백인과 흑인 간의 분리제도를 금지시키고 경찰의 미란다 원칙을 확립시켰다.
이승만 정권 이후 우리나라에선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충돌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법부가 알아서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는 국가로 전락한 것인가. 지난 정권처럼 법원조직을 개혁한다고 하면서 친정권적 인사들로 고위 법관직을 장악해버리는 사태가 번번이 통한 것인가.
우리 법조계는 너무 정체해 있다. 쇄신할 필요가 있고, 전관예우 관행도 없애야 한다. 그렇더라도 가장 기본인 국민적 신뢰와 판결의 권위부터 수립해야 한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 한다는 헌법조항의 가치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삼권분립제도는 1인의 폭주와 다수의 폭주를 모두 견제할 책무를 법원에 부여한다. 권력자의 정치적 압력을 극복해야 하고, 사회적 팬덤에 의한 대중의 압력에도 초연해야 한다.
법리에 충실한 판결에 대해서도 정치적 이익에 맞지 않으면, 군중심리를 부추겨 해당 판사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일이 일상화됐다.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내린 서울중앙지법 김양호 부장판사의 판결(2021년 6월)에 대해 추미애 법무장관이 나서서 "대한민국 판사가 아니라 일본국 판사"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한민국은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 가치는 그 어떤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출범했다. 이젠 그 자존심부터 회복해야 한다.
실체적 진실을 조속히 확정하는 것도 사법부의 기본임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공직선거(2020년 4.15 총선)에서 조직적 부정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소송을 대법원은 2년 넘게 지연시켰다. 증거조사, 증거보전, 입증책임 배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각판정을 내렸다.
앞으로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거나 재판·판결을 지연시켜 정치적 행보에 편승하려는 시도가 만연한 사법부에서 자체적인 업무 윤리규정을 만들어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 정치활동을 하거나, 재판을 정치적 고려에 의해 지연시키거나, 재량권을 남용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법관을 엄중히 징계해야 한다.
법관 인사원칙도 투명하고 공정하게 수립하고 공개하며, 법관이 양심과 전문성에 의해 내린 판결이 사회적 권위를 지닐수 있도록 법률문화 형성작업도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결국 정권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법 정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을 진행해야 한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방관이 가장 필요한 때는 불이 났을 때다.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대법원의 양심은 돌아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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