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백건우의 인생을 함께 들었다
백건우-SAC오케스트라 협연
지휘자엔 안토니오 멘데스
'건반 위 구도자' 백건우
힘으로 몰아붙이려 하지 않고
연륜·노련함으로 전율 불러
천진난만한 모차르트부터
처연하고 애달픈 모습까지 그려내
예술가에게 독특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건 일종의 훈장과도 같다. 단순히 기량이 뛰어난 것을 넘어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존재란 의미라서다. 일평생 ‘건반 위의 구도자’란 별칭을 달고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온 피아니스트 백건우(77)처럼 말이다.
백건우가 지난 27일 스페인 출신 지휘자 안토니오 멘데스, 해외 유수 악단에서 활동 중인 연주자들이 주축이 된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2023 예술의전당 여름음악축제’ 폐막 공연 무대에 올랐다.
열 살 때 해군교향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한 뒤 명반 ‘스크랴빈 피아노 작품집’(1992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집’(1993년)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음반상인 황금 디아파종상을 휩쓴 거장(巨匠)의 귀환에 이날 서울 예술의전당은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오후 5시. 진중한 표정으로 무대로 천천히 걸어 나온 백건우가 들려준 곡은 간결한 어법과 경쾌한 리듬, 다채로운 악상으로 채워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백건우는 시작부터 건반을 깊게 누르기보단 가볍게 툭툭 끊어치면서 모차르트 특유의 순수한 음색을 살려냈다. 하나의 선율 안에서 예민하게 밀도를 조율하며 움직이는 손놀림과 단단한 음색은 모차르트의 기품과 활기를 동시에 펼쳐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청아한 음색과 한음 한음 통통 튀어 오르는 명료한 터치로 어릴 적 천진난만한 모차르트를 보여주다가도 돌연 모든 힘을 빼고 처연하면서도 애달픈 색채를 불러오는 그의 연주는 말년에 극심한 생활고로 고통받은 모차르트의 굴곡진 인생을 덤덤히 읊는 듯했다. 어린 연주자들이 열정적으로 건반을 내려치며 만들어내는 긴장감과는 완전히 다른, 오랜 연륜에서 비롯된 숨 막힐 듯한 전율이 온몸을 에워싸는 순간이었다.
완서악장인 2악장에선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에 차이를 주면서 자칫하면 단조롭게 들릴 수 있는 선율에 풍부한 색채를 덧입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작품 특유의 천연한 서정과 입체감이 온전히 살아났다. 마지막 악장. 백건우는 뼈대가 되는 음은 강한 타건으로, 나머지 음은 둥글게 감싸 소리 내는 듯한 가벼운 터치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선율의 매력을 펼쳐냈다.
과도한 힘이나 표현 하나 없이 오로지 모차르트가 악보에 써낸 음악적 언어, 견고한 구조, 짜임새를 담담히 풀어내는 데 집중한 그의 연주에 청중은 열광했다. 전성기를 맞은 여느 젊은 피아니스트 못지않은 뜨거운 환호와 박수 세례였다.
2부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으로 채워졌다. 거대한 스케일과 서정적인 선율, 끝없이 변화하는 화려한 악상을 특징으로 하는 이 작품은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교향곡 중 하나로 꼽힌다. 멘데스는 엄격한 지시와 통제로 악단을 강하게 이끌기보단 연주자들이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일종의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주는 지휘를 선보였다. 프로젝트 악단이 통상 그렇듯 초반엔 악기군별로 소리가 응축되는 힘이 부족해 다소 어수선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는데 멘데스는 이를 빠르게 인지하고 선율 진행을 세밀하게 조율해가며 음향적 균형감을 살려냈다.
낭만적인 선율과 화성으로 유명한 3악장에선 클라리넷을 비롯한 목관이 명징한 터치와 우아한 음색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애절한 러시아 서정을 완연히 드러냈다. 이를 뒤에서 받쳐내는 현악의 신비로운 선율과 금관의 짙은 울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악곡 전체의 입체감을 살려냈다. 마지막 악장에선 빠르게 쏟아지는 음표 속에서도 정확한 리듬 표현과 견고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을 지켜가면서 안정적인 호흡을 선보였다.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모든 악기군이 응축된 소리와 음악적 표현을 증폭시키면서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라흐마니노프 작품 특유의 장대한 역동성과 박진감을 펼쳐내기에 충분했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단연 백건우의 연주였다. 세월에 바래지 않고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기교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진 그의 음색은 마치 한평생 음악만을 바라본 거장에게 주어진 특권 같았다. 따라 하려야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 전부가 녹아 있는 그런 연주. 백건우의 음악이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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