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영화 ‘오펜하이머’의 진실] 원폭 개발 이끈 국가 영웅의 몰락과 명예 회복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67)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 21명을 포함해 당대 최고 과학자 6000여 명을 이끌고 단 3년 만에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시켰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최고의 과학자에서 종전 후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몰락한 오펜하이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 ‘사이언스’와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각각 오펜하이머 전기를 쓴 작가를 인터뷰해서 영화가 과학자 오펜하이머를 얼마나 정확히 그렸는지, 오펜하이머의 삶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지 분석했다.
“과학 묘사 정확, 보어 부분 짧아 아쉬워”
‘네이처’는 7월 26일(이하 현지시각) ‘원자폭탄 만들기’의 저자인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를 통해 영화를 분석했다. 1987년 출간된 원자폭탄 만들기는 1987년 전미 도서상과 도서비평가협회상, 198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로즈 작가는 “대체로 잘 만든 영화”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1938년 핵분열 현상이 발견된 후 물리학자들이 모여 핵무기 개발을 피하려고 “이건 외부에 알리지도, 연구하지도 말자”고 말하는 장면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는 1902년 마리 퀴리가 방사성 물질 라듐을 처음 발견한 이후 줄곧 과학계가 원자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법을 공개적으로 논의했다는 것이다.
로즈 작가는 오펜하이머가 38세에 로스앨러모스연구소를 이끄는 자리에 발탁된 것은 전적으로 미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덕분이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그로브스 장군의 질문에 대해 언제나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해 인정을 받았다. 심지어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와 관련됐다는 비밀 보고서를 보고도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결점을 잘 알고 군의 지휘 체계를 따랐지만, 다른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로즈 작가는 영화에서 덴마크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가 크게 다뤄지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보어는 독일의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와 양자물리학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보어는 미국으로 가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보어는 핵무기가 일종의 전쟁 억지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은 나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1999년 둘 다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르킬 전쟁으로 근거를 잃었다. 심지어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아직도 전쟁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있다.
“블랙홀 연구는 노벨상 수상감”
‘사이언스’도 7월 17일 오펜하이머 전기 작가인 데이비드 캐시디(David Cassidy)와 인터뷰를 실었다. 미국 호프스트라대 화학과 명예교수인 캐시디는 2004년 ‘오펜하이머와 미국의 세기(J. Robert Oppenheimer and the American Century)’를 출간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말고 개인적인 연구 성과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양자물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당시 양자물리학의 전성기를 이끈 하이젠베르크나 볼프강 파울리보다 3~4세 어렸기 때문에 학계 주역이 될 수는 없었다. 오펜하이머가 아무리 잘해도 양자물리학의 창시자들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캐시디 교수는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블랙홀에 관해서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했다”고 밝혔다. 오펜하이머는 1939년 별이 수명을 다하고 붕괴하면서 수축하면 엄청난 밀도를 가진 블랙홀이 생긴다고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펜하이머의 블랙홀 연구는 더 진척되지 않았다. 캐시디 교수는 “1990년대가 돼서야 블랙홀에 대한 실험적인 증거가 나왔다”며 “오펜하이머가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전후 미 공군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그는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수소폭탄을 사용할 만한 군사적 목표는 없다고 주장했다.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 주도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일자 오펜하이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사람들은 그가 과거 공산주의자와 교류한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는 청문회에 나가 자신을 변호했지만, 결국 정부에서 일하는 데 필수적인 비밀 취급인가 자격을 잃었다.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낙인처럼 찍혀 있던 스파이 혐의는 이제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제니퍼 그랜홀름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편견과 불공정의 증거가 밝혀졌고,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확인해 스파이 혐의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회복하는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아인슈타인이 바보라고 부른 사나이”
영화의 원작은 2005년 카이 버드(Kai Bird)가 출간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원제 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다. 버드는 이 책으로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버드 작가는 7월 17일 NYT 기고문에서 1954년 봄 어느 날 오펜하이머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상대성이론을 만든 세계적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마주친 장면을 묘사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1947년부터 연구소장을 맡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1933년 독일에서 탈출해 이곳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청문회에 나가 자신의 스파이 혐의에 대해 변호해야 한다며 몇 주 결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가 없다”며 “이것이 조국에 봉사한 대가라면 등을 돌려야 한다”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오펜하이머를 가리키며 “저기 바보가 간다”고 했다고 한다.
버드 작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누명을 쓰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오펜하이머 사건은 이후 모든 과학자에게 지식인으로 정치 무대에 서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며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비극”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의 몰락을 보고 과학자들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버드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전후 핵무기를 반대했지만, 로스앨러모스에서 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간의 과학적 탐구를 막을 수 없고 원자폭탄 발명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으로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 더 많은 인명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동시에 오펜하이머는 인간이 이러한 기술을 조절하고 지속 가능하며 인간적인 문명에 통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고 버드는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전후 핵무기 개발은 더는 하지 말고, 국제기구를 통해 지금 있는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의 노력으로 1950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창설됐다. 오펜하이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일은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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