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43>] ‘내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다니까요!’ 교권(敎權)의 심리학
소설가 김훈이 제기한 ‘내 새끼 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만만찮다. 일부에서는 김훈이 내 새끼 지상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족을 지목한 것을 두고 극단적으로 반발한다. 지엽말단을 가지고 본질을 흐리는 가당찮은 반응이다. 자기 자식 잘 키우겠다는 일념만으로 공문서를 위조하고 허위 경력서를 발급받은 것은 팩트가 아닌가.
그러고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내 자식 때문에 손해 본 수험생이 있느냐?’고 적반하장이다. 조국 일가야 그렇다 치자. 그런 그들을 두둔하는 것은 그야말로 진영 논리에 입각한 전형적인 집단 편향의 오류에 해당한다. 내 편이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남의 편이라도 맞는 것은 맞는 것이다. 오로지 내 편만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싸고도는 ‘내 집단 편향(In-group bias)’은 사회적 분열의 시발점이 된다.
내 새끼 지상주의
김훈은 오늘날 공교육 파탄의 근본 원인이 ‘내 새끼 지상주의’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의 실체가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김훈은 공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인데, 악성 민원이란 내 새끼만을 싸고도는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집단이 자행하는 갑질과 다름 없다. 김훈에 의하면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남의 자식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내 새끼만 철통같이 보호하고, 내 자식을 세상의 높고 안락한 자리에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문제는 이 내 새끼 지상주의가 내 자식이 겪는 사소한 불이익도 견디지 못하는 학부모들, 아이들이 교실에서 사소한 다툼이 벌어져도 오로지 내 편만 들어 달라고 떼를 쓰는 학부모들 때문에 사회 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 김훈의 생각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김훈은 오늘날 공교육 파탄의 주범으로 내 새끼 지상주의를 지목했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기제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류에게 생존과 번식은 본능이다. 번식 본능은 출산 이후 자손을 양육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인류는 사람들과 사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면서 경쟁하기도 하고 협동하기도 한다. 경쟁과 협동의 적절한 조화는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영장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생태적 성공에 이르게 한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지위나 자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또한 그렇게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서도 협력할 것은 협력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의 많은 학부모는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오직 경쟁에서 살아남기만을 추구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본능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그것에 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 새끼 지상주의가 만연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학력 지상주의 풍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 국한된 작은 땅덩어리라는 지정학적 요인이 특정 학교 몇 개를 졸업한 사람들이 나라 전체의 요직을 독점하는 게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는 국토 면적이 크기 때문에 하버드대나 예일대 같은 아이비리그 몇 개 대학의 졸업생이 미국 전역의 전 부문을 통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중국 역시 베이징대나 칭화대 같은 몇 개 대학 졸업생이 중국 전역을 커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우리나라를 ‘서울대의 나라’라고 냉소적으로 탄식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은 ‘하버드대의 나라’ ‘베이징대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다. 상황이 이러하니 학부모들이 기를 쓰고 오로지 자기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그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 현재 학부모들이 학창 시절 겪은 학교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에 한몫 단단히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대략 지금의 40세 이상의 학부모들은 학창 시절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에 시달리며 학교생활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001)’를 보면 학교 선생님이 잘못한 학생을 시곗줄까지 풀고 과도하게 두들겨 패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세대가 보기에 그 장면은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예술적 형상화가 아니라 생생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일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교사에 의해 일상적으로 저질러졌던, 체벌이라는 이름의 일상적 폭력. 그것은 우리 세대에게 ‘교사들의 폭력’에 대한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런 현상은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에게도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교육 현장의 어두운 그림자였고, 지금도 우리 세대에게 뿌리 깊이 남아있는 트라우마의 하나다. 본인이 직접 체벌을 받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목도한 학생들에게도 정신적 생채기는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 시대를 직접 통과해 학부모로 변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타인의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특히 많은 형제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자신들과는 달리, 대개 외동아이만을 낳는 요즘 풍조에서 아이들은 학부모들에게 소황제(小皇帝)나 다름없다.
소황제를 모시는 시녀나 내관들은 황제에게 위해를 가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대항하고 철저히 보복한다. “우리 애에게는 왕의 DNA가 흐르고 있어요!” 어느 교육부 관리가 담임 교사에게 보냈다는 편지 속의 한 구절은 얼핏 과대망상처럼 들리지만, 그 관리는 실제로 그리 믿고 있을 것이다.
방송 인터뷰에서 한 교사는 증언한다. “자신의 아이가 새치기하는 중에, 다른 아이가 밀쳐 버리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부모가 잽싸게 달려왔어요. 그런데 새치기를 한 자기 아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고 안아주는 것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졌어요.”
내 새끼 지상주의는 기본적인 도덕 감각조차 무디게 만든다. 사람을 맹목으로 만든다. 이런 어이없는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 중에 사람들이 쉬쉬하며 언급을 회피하는 사실이 있다. 옛날에는 교사들의 평균 학력이 당대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부모 대부분이 무학(無學)이거나 국졸(國卒)의 자칭 무지렁이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 교사의 위상은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되는 스승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상황이 일변했다. 학부모 대부분이 교사들과 같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 아니 교사들보다 학력이 높은 학부모들도 수두룩하다. 옛날에는 일부 가진 학부모들만 교사들에게 ‘진상’을 부렸지만, 요즘에는 학부모들이 학력을 근거로 갑질이나 ‘진상’ 짓을 일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교사들은 증언한다. 어떤 학부모는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갑질’에 ‘진상’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 서울대 나왔는데 당신 어디 나왔어요?” “나 카이스트(KAIST) 나오고 하버드대 박사 출신인데 어디 감히….”
옛날에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돕지 않고는, 또 공동체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어떤 이가 상호 협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잇속만 챙긴다는 평판(reputation)이 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치명적이었다. 사회적인 출세는커녕 일용할 양식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추방이나 유배가 그렇게 큰 형벌이었던 이유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닌 말로 돈만 있다면 ‘혼밥’에 ‘혼술’도 가능한 사회가 됐다. 공동체와 협동의 중요성이 떨어진 이 현상은 생각보다 엄청난 변화다.
그러다 보니 남의 눈치 안 보고 ‘진상’ 짓을 일삼으며 내 새끼 챙기기에만 올인하는 ‘진상’ 학부모가 즐비하다. 선생 노릇 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사회다. 학력 지상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함께 협력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 멋진 학교가 될 수는 없을까. 맹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했다. ‘선생 노릇 하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온 사회가 총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그게 좋은 학생, 좋은 사회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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