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와인 <44> 고대 그리스인의 와인, 레치나] 풍부한 과일 향과 은은한 솔 향의 매력적인 조합
심포지엄은 원래 그리스 말이다. 전문가들의 토론회를 뜻하는 현대적 의미와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교 모임을 일컬었다. 심포지엄이 열리면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고 와인을 마시며 삶을 논하고 시와 음악을 즐겼다. 이때 그들이 마신 와인은 어떤 맛이었을까. 요즘 와인과 비슷했을까.
놀랍게도 당시 와인에서는 ‘솔 향’이 났다. 레치나(Retsina)라는 이 와인은 지금도 그리스에서 생산되고 있다. 4000년이 넘는 그리스 와인 역사의 상징인 레치나가 최근에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며 전 세계 와인 애호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오크통이 발명되기 전 그리스에서는 와인을 암포라에 담아 보관하고 유통했다. 그런데 진흙으로 구워 만든 암포라는 밀봉이 되지 않아 와인이 쉽게 산화되는 것이 문제였다. 해결책으로 사용된 것이 송진이었다. 항아리 내부에 송진을 펴 바르고 입구도 송진으로 봉하면 공기가 통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송진의 살균력 때문에 와인이 잘 상하지 않았고 와인에서 은은한 솔 향이 나니 마시기에도 훨씬 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송편을 찔 때 솔잎을 넣는다.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솔잎의 피톤치드 성분 덕분에 떡이 잘 쉬지 않고 솔 향도 더하는 효과가 있다. 이역만리 두 나라가 비슷한 전통을 가졌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와인에 송진을 넣는 문화는 로마에도 전파됐다. ‘박물지’를 저술한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와인 속 작은 송진 조각이 이에 붙어 입안에 알싸한 맛이 퍼지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로마에서도 솔 향이 나는 와인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레치나는 그리스의 굴곡진 역사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점령이 그 시작이었다. 이슬람교는 음주를 금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와인 생산을 허용했다. 와인에 세금을 부과해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산, 판매, 유통 등 단계마다 부과된 과도한 세금은 와인 산업의 위축을 가져왔고 결국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1832년 그리스가 독립한 뒤 와인이 서서히 부활하긴 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하루아침에 되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열악한 시설에서 만들어진 와인은 맛이 형편없었고 열등한 품질을 솔 향으로 가리려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저급한 송진을 사용하거나 너무 많은 양을 넣는 바람에 ‘레치나는 싸구려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고 만 것이다.
레치나의 화려한 부활
최근 레치나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눈부시게 성장한 그리스 와인의 품질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레치나는 전통적으로 사바티아노(Savatiano)라는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로디티스(Roditis)나 아시르티코(Assyrtiko) 등 다양한 토착 품종이 사용되면서 베이스 와인의 품질이 훨씬 좋아졌다. 레치나의 고향인 아티카(Attica) 지역도 아테네가 대도시로 성장하며 포도밭 면적은 줄었지만 과거에 심어 둔 사바티아노가 고목이 되어 한층 고급스러운 와인을 생산함에 따라 레치나의 품질이 함께 좋아지는 긍정적인 결과를 맞이하고 있다.
레치나의 맛은 송진의 양과 품질에도 좌우된다. 포도즙 100L당 허용된 송진의 양은 최대 1㎏이지만 그리스 와인 생산자들은 그보다 훨씬 적은 양을 넣는다. 베이스 와인의 풍부한 과일 향과 은은한 솔 향이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다.
송진도 반드시 지중해가 원산지인 알레포(Aleppo) 소나무에서 나온 것만 쓰고 갓 채취한 신선한 송진을 사용하는 것이 고품질 레치나 생산의 핵심 포인트다. 그럼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레치나에서는 과연 어떤 맛이 날까. 와인에 코를 대고 향을 느끼면 제일 먼저 산뜻한 솔 향이 시원하게 올라온다. 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같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맛을 음미하면 레몬, 라임, 복숭아 등 감미로운 과일 향과 솔잎, 민트, 오레가노, 타임 같은 허브 향이 상쾌한 부케를 이룬다.
그리스 전통요리부터 한식까지 완벽한 궁합
레치나는 음식과 즐길 때 더욱 맛있는 술이다. 그리스에서는 어울리는 음식을 따로 구분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요리에 레치나를 곁들인다. 페타 치즈나 올리브 같은 짭짤한 안주와 간단히 한 잔 즐겨도 좋고, 튀김 요리나 올리브오일을 듬뿍 두른 샐러드에 곁들이면 와인의 상큼함이 음식의 기름진 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혹시 그리스를 여행한다면 전통 꼬치 요리인 수블라키에 레치나를 꼭 마셔 보기 바란다. 음식에 뿌린 향신료와 와인의 솔 향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다. 레치나는 한식과도 궁합이 좋아 오징어튀김, 닭꼬치, 해물파전, 부추전 등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국내에 수입되는 레치나는 아직 종류가 많지 않지만 모두 품질이 좋고 개성도 뚜렷하다. 리가스(Ligas) 와이너리의 요마타리(Yomatari)는 그리스 최고의 청포도 품종인 아시르티코로 만든 프리미엄급 레치나다. 와인의 탄탄한 질감이 매력적이고 레몬, 자몽, 귤 등 상큼한 과일 향과 솔잎, 연꽃, 생강의 은은한 풍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카마라(Kamara) 와이너리의 님부스 리티니티스(Nimbus Ritinitis)는 내추럴 와인에 송진을 더한 독특한 스타일이다. 라임, 복숭아, 오렌지 등 과일 향이 풍부하고 솔잎, 오레가노, 라벤더의 풍미가 여운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케크리스(Kechris) 와이너리의 레치나 두 종도 곧 수입될 예정이다. 전통 레치나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케크리바리(Kechribari)를, 모던하고 세련된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티어 오브 파인(Tear of Pine)을 추천한다. 조만간 지인들과 함께 소박한 안주에 레치나를 즐길 계획이다. 늦여름의 풍류가 깃든 작은 심포지엄을 기대해 본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