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29>] 민족과 국가와 개인…난세(亂世)에서의 슬기로운 거취는?
남송 전기의 신기질(辛棄疾·1140~1207)은 역대 최고 사인(詞人)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스케일이 크고 시원스러운 풍격의 작품을 잘 써서 소식(蘇軾)과 함께 이른바 ‘호방파(豪放派)’의 대표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는 한족이지만 원래 금(金)나라 사람이었다. 1127년 여진족(女眞族)이 북송을 멸하고 북방을 지배한 지 13년이나 지난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신찬(辛贊)은 금의 치하에서 옛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의 지부(知府) 등 고관을 지내기도 했다. 부모는 그의 유년 시절에 일찍 죽어 조부 밑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 당회영(黨懷英·1134~1211)과 함께 유첨(劉瞻)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유첨도 금나라에서 진사에 급제해 사관편수(史館編修) 등을 지낸 인물이다.
신기질이 22세이던 1161년 황제 완안량(完顏亮)이 대군을 일으켜 남송 정벌에 나섰다. 이때 과중한 부역과 징발을 견디지 못한 한족이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다. 신기질도 분연히 나서서 경경(耿京)의 의병에 투신, 격문(檄文)의 기초 등을 담당하는 장서기(掌書記)를 맡았다. 경경은 남송과 연대하기 위해 신기질 등을 보냈다. 남송의 고종(高宗)이 그들을 접견하고 경경과 신기질을 남송의 정식 관직에 임명하는 칙서를 내렸다.
그때 의병 쪽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장안국(張安國) 등이 경경을 살해한 뒤 일부 병력을 이끌고 금군에 투항한 상태였다. 소식을 접한 신기질은 남송군 50명을 지원받아 금군 진영으로 잠입, 장안국을 붙잡아 적진을 탈출했다. 장안국은 남송 진영에서 참수되고, 신기질은 이 일로 일약 조야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는 후일의 여러 작품 속에서 이때의 일들을 감회 깊게 그리고 있다.
남송에서 신기질은 고토(故土) 수복(收復)의 염원으로 평생 분투했다. 정세를 분석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화파(主和派)가 득세하던 당시의 정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앙앙불락하며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30대 후반의 어느 날, 강서(江西)에 있는 조구(造口)라는 곳의 ‘울고대(鬱孤臺)’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시름에 잠겼다. 그때 벽에 적은 것이 ‘보살만(菩薩蠻)’이라는 다음 작품이다.
“울고대 아래의 맑은 강물, 그 속에 지나는 이들의 눈물이 얼마나 많을까. 서북쪽으로 장안을 바라보려 하나, 가엽게도 무수한 산이 가로막는구나(鬱孤臺下淸江水, 中間多少行人淚. 西北望長安, 可憐無數山). 청산도 가릴 수 없어, 이 물은 끝내 동쪽으로 흘러가리니. 석양 비친 강물이 나를 시름겹게 하는데, 깊은 산에서는 자고새 소리 들려오누나(靑山遮不住, 畢竟東流去. 江晚正愁余, 山深聞鷓鴣).”
한편, 북방의 당회영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상심한 나머지 산속에 은거하기도 했다.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면 수입이 없어 생활이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절치부심한 그는 30대 후반에 마침내 진사에 급제했다. 그 뒤로 여러 관직을 거치며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역대 군주의 깊은 신임을 얻어 문단의 주도 인물로 받들어졌다.
당회영 이전에는 오격(吳激·1090~1142)과 채송년(蔡松年·1107~59) 등이 송 멸망 후의 북방에 잔류, 금 조정의 후대로 높은 지위에 오르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회영의 후배로는 왕정균(王庭筠·1151~1202)과 조병문(趙秉文·1159~1232)을 비롯해 왕약허(王若虛·1174~1243)와 이순보(李純甫·1177~1223) 그리고 원호문(元好問·1190~1257)이 문단의 맹주(盟主) 역할을 했다. 이들도 모두 금 조정의 충실한 관료였다. 왕약허와 원호문은 1234년 금이 몽고족에 멸망된 뒤에 원(元)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유신(庾信·513~581)은 당(唐) 이전의 대표적 문인으로 특히 두보(杜甫)에 의해 높이 평가됐다. 두보는 ‘봄날 이백을 그리워하다(春日憶李白)’라는 시에서 “맑고 새롭기는 유개부와 같고, 빼어나고 시원스럽기로는 포참군과 같다(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고 했다. 이백의 시풍이 남북조시대 말기의 유신과 그 이전의 포조(鮑照)를 합한 것처럼 뛰어나다는 말이다.
유신은 42세까지 한족 왕조인 양(梁·502~557)의 관료였으나, 인생의 후반은 북방의 이민족 왕조인 서위(西魏·535~556)와 북주(北周·557~581)에서 보냈다. 명문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친 그는 ‘옥대신영(玉臺新詠)’을 편찬한 서릉(徐陵·507~583)과 함께 당대의 대표 시인이었다. 그러다가 서위에 사신으로 파견된 뒤 억류돼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위의 황제에 의해 중용된 그는 얼마 뒤 북주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북주의 신하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었으나 이로 인해 그는 문학적으로 오히려 더 크게 성공했다. 허식적 내용과 화려한 수사로 일관했던 전기의 작풍에서 벗어나 뼈저린 경험으로 처절하고 비장한 정서가 반영된 진지한 작품들을 써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두보는 “유신의 문장은 늙어서 더욱 성숙했으니, 구름을 넘는 굳건한 필력으로 거침없이 뜻을 펼쳤다(庾信文章老更成, 凌雲健筆意縱橫)”고 했다.
유신과 동시대 문인인 왕포(王褒·513~576)의 경우 또한 비슷하다. 그는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조카사위로서 고관대작에 올라 부귀를 누렸으나 554년 서위가 침공해 왔을 때 포로가 돼 북조로 끌려갔다. 그 뒤 황제의 후대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며 관료와 문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북조에서 생을 마쳤다.
‘안씨가훈(顔氏家訓)’의 저자로 유명한 안지추(顏之推·531~597) 역시 서위가 쳐들어왔을 때 붙잡혀 북조로 간 인물이다. 서위에서 잠시 벼슬살이하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고 황하를 따라 내려가다가 사정이 여의찮아 동쪽의 북제(北齊·550~
577)에 머물게 됐다. 북제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사 관직을 주었다. 얼마 뒤 남방의 양이 멸망하고 진(陳)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그는 북제에서 적극적으로 관직에 종사해 황문시랑(黃門侍郞)에까지 올랐다. 577년 북제가 북주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다시 포로가 된 그는 장안으로 끌려가 결국 또 북주의 신료가 됐다.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를 찬탈, 수(隋)를 세우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양견의 신하로서 새 정권에 봉사했다.
이보다 앞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왕맹(王猛·325~375)은 서북방의 이민족 ‘저(氐)’가 세운 전진(前秦·351~394)의 재상으로서 일세를 호령하며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진(晉·265~317)이 이미 멸망해 조정을 남쪽으로 옮겨간 뒤였다.
왕맹의 젊은 시절, 동진(東晉)의 권신 환온(桓溫)이 대군을 이끌고 북방을 공격한 뒤 한동안 진주했다. 혈기방장의 그는 허름한 차림으로 환온을 찾아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쳤다. 환온이 그를 낮추어 보며 이것저것 묻자 그는 옷 속의 이를 잡으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 ‘문슬(捫蝨)’의 고사는 그 뒤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 재기와 풍모와 담력에 탄복한 환온은 좋은 말과 수레를 주고 높은 직위를 약속, 함께 동진으로 가자고 권유했으나 왕맹은 거절했다.
그 뒤 왕맹은 30대 초에 전진 황제 부견(苻堅)의 부름을 받아 자신의 경륜과 정치적 포부를 펼쳤다. 당대의 가장 걸출한 군주와 재사(才士)의 이 만남은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관계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북방을 거의 통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왕맹이 일찍 죽었다. 그 뒤 부견은 왕맹이 생전에 한 당부를 귀담아듣지 않고 무리하게 대군을 일으켜 동진을 치다가 대패, 결국 다른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목숨도 잃었다.
이상의 예들에서 보면 신기질 말고는 모두 한족(漢族)으로서 이민족의 왕조에 봉사한 인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들을 ‘한간(漢奸·한족의 배반자)’이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너무 오랜 옛날 일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개인적인 사정을 이해하거나 동정해 줘서인가. 물론 과거의 여러 이민족은 이미 역사 속에 동화되어 흔적도 없다.
과연 난세의 역사와 난세를 살아간 역사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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