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는 또다른 가해자” 무용으로 구현한 ‘실체적 학폭’
추상성 배제하고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문제의식 드러내
(시사저널=강윤서 인턴기자)
"괴롭힘 당하는 걸 알면서도 왜 다들 못 본척 하지? 아무도 못 봤으면 없는 일이 되는 건가?"(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 중에서)
폭풍전야. 시연이 시작되자마자 불길함이 엄습한다. 학교 교실을 본뜬 무대에서 곧 끔찍한 광경이 펼쳐질 듯하다. 사면이 회색인 '교실'에 줄지어 놓인 회색 책상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거기다 무용수들까지 회색 교복을 갖춰 입었다. 무용수들이 한 명씩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다. 대한민국 학교 그대로의 모습이다. 앉은 채 무표정으로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 모습에 음악이 어우러진다. 무대와 객석에 긴장이 증폭된다.
군무가 끝난 뒤 조용해진 교실에서 무용수 16명 중 하나의 발악이 시작된다. 학교폭력 가해자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얌전히 앉아 있는 앞자리 학생의 뒤통수를 향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혐오를 온몸으로 끌어올린다. 나머지 학생들은 폭군의 분노로 압도당한 교실 분위기에 무기력하게 흡수된다.
9월 7~10일 공연을 앞두고 8월25일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시연된 현대무용 'GRIMENTO'(그리멘토)는 학폭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교실을 사실주의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리멘토는 프랑스어 '그리'(Gris·회색)와 라틴어 '메멘토'(Memento·기억)를 합친 말로, '회색의 순간들'이라는 뜻이다. '일무', '묵향' 등 전통무용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작업으로 주목받아온 연출가 겸 디자이너 정구호가 세계적인 무용단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 출신 안무가 김성훈과 협업해 제작했다. 실감나는 '몸과 표정'의 향연은 단 15분 간의 시연 만으로도 객석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방관자는 또 다른 가해자"
정구호 연출은 학폭을 '회색'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풀었다. 평소 학폭 문제에 관심이 많아 무용계 입장에서 문제인식과 치유를 사회에 전달하고 싶었다고 정 연출은 전했다. '그리멘토'가 그동안 학폭 문제를 다룬 숱한 매체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군중심리'를 조명했다는 것이다. 정 연출은 학폭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주를 이루는 이슈지만, 방관자의 영향력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관자 수가 가해자보다 많음에도 그들이 학폭을 막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멘토를 통해) 끄집어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안무가는 "회색에 여러 채도가 있듯 중간 매체(방관자)의 역할이 강해져 사건이 해결되기도 하고, 반면 무관심과 두려움의 군중심리가 커질수록 또 다른 가해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잔인한 현실 담은 아름다운 예술
'그리멘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작은 꼬투리', '차별', '끝없는 폭력', '폭동과 분열', '치유' 등 총 6장으로 구성됐다. 정 연출은 대사가 없는 무용임에도 관객들이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각 장의 이야기를 끌고가는 무용수 16명의 캐릭터는 모두 다르다. 김 안무가는 실제 학생들의 습관과 버릇 등을 리서치해 안무에 반영했다. 16명의 표정과 걸음거리 하나하나까지 다르게 설정해 각자의 성격과 심리적 갈등을 세밀하게 표현하려 애썼다고 김 안무가는 설명했다.
시연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 간담회에서 정 연출과 김 안무가는 학폭의 현실을 예술에 녹여내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성취 등에 대해 나눴다.
학폭 장면을 연출할 때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정구호 연출 "정말 많이 고민했다. 모두가 아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기 싫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현실적인 치유을 전하고자 한다.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표현으로는 그 감흥을 전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김성훈 안무가 "기존 현대무용의 틀에서 벗어나 굉장히 극적이고 폭력성도 담긴 사실적인 안무를 만들었다. 당초 추상적인 안무를 시도하려 했더니 오히려 무용수들이 원치 않았다."
연출의 궁극적인 의도인 '치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정 연출 "무용수들의 몸과 표정에 치유를 담으려 했다. (학폭을 극복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스스로 해결책을 습득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사과하고 방관자는 '도움을 줬다'면서 적당히 끝나버리면, 결국 또 피해자 혼자 남는다. 그렇게 남겨진 피해자가 갖게 될 어둠의 기억들을 작품에서 드러냈고, 마지막에는 이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솔루션을 담았다."
무용수들이 주는 몰입감이 엄청나다.
▶정 연출 "무용수들이 연습을 안 할 때도 본인 역할을 많이 연구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피해자 역할을 맡은 무용수는 (실제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점점 살이 빠지기까지 했다."
교실을 조명했으나 교실 너머 일반 사회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정 연출 "세대가 거듭돼도 사라지지 않는 나쁜 관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싶었다. 특히 교복에는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일터에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살아간다는 상징을 담았다. 학교나 직장 등 일상 생활 환경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임에도 늘 같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때 나쁜 관습도 똑같이 학습해 사회에 나오고, 부모가 되어 다음 세대에게 전가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고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공간과 의상을 준비했다."
작품을 보게 될 관객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나.
▶정 연출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을 비롯해 회색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그 누구든 와서 보면 좋겠다. 우리 이야기가 정답은 아니다. 다만 '그리멘토'를 보고 우리가 전하는 치유를 놓고 많은 토론이 뒤따르길 기대한다."
"학폭을 같이 방관하는 기분도 들 것"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싱크 넥스트 23' 폐막작으로 공연되는 '그리멘토' 무대는 객석과의 거리가 일반 현대무용 공연보다 가깝다. 이날 시연에서도 무용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생생하게 눈과 귀에 담겼다. 회색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몰입감이 커질수록 더욱 빡빡하게 다가온다. 어느덧 무대와 객석의 물리적·심리적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정 연출은 공연장을 찾을 관객들에게 "무용수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면서 "어쩌면 (학폭) 사건을 같이 방관하는 기분도 들 것"이라고 예고했다.
정 연출과 김 안무가는 이미 서울시무용단의 '일무'로 성공적인 협업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멘토'는 정 연출의 기존 작품들에 비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격이 강하다. 정 연출은 "이제껏 한 작업 중 가장 분위기가 무겁지만 뭉클함도 주는 작품"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예술가가 학폭을 소재로 다루고 관련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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