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함 이름 버리나…국제기준 ‘나라 망했거나 독재자거나’

권혁철 2023. 8. 2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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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정부 ‘역사 쿠데타’]국방부 “검토”…해군은 즉각 ‘반박’
군함명 변경은 세계 규범에 어긋나
예외는 나라 없어지거나 독재할 때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모습. 방위사업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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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육사) 교정에 있는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방침과 관련해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꾸는 문제를 두고 국방부와 해군이 공개 브리핑 자리에서 시각 차를 드러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면 잠수함 홍범도함 이름을 바꾸느냐’는 질문에 “검토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검토한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홍범도함 이름 변경이) 검토할 사안이나, 결정된 바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가 육사에 있는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그 불똥이 잠수함 이름까지 번진 것이다.

앞서 지난 25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 관련해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 억제를 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육사)에서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냐는 문제가 제기됐다”고 말했다.

■ 군함 명칭 변경은 해군 고유 권한 

전하규 대변인이 ‘홍범도함 이름 변경을 검토한다’고 밝히자, 브리핑에 배석한 장도영 해군 서울공보팀장(중령)은 브리핑 중간에 다른 발언을 했다.

장 팀장은 “(홍범도함) 이름 변경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공개 브리핑에서 해군이 국방부 대변인의 설명과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것은 무척 특이한 장면이다. 정례 브리핑 전에는 국방부가 합동참모본부, 육해공군, 해병대 등과 답변 내용, 메시지를 사전 조율하기에 이런 엇박자가 나지 않는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위)과 장도영 해군 서울공보팀장(아래)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MBC 뉴스 유튜브 채널 갈무리

해군 입장에서는 국방부 대변인 설명만 듣고 침묵할 수 없는 사안으로 봤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먼저 해군은 함명 변경 논의를 고유 권한 침해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군함의 이름 짓기는 해군 고유의 권한이다. 해군 규정인 ‘부대명칭 개정 규정’에 따라 고속정급 이상의 함정은 해군본부 전력기획참모부장(소장)이 함정 확보 단계에서부터 함명 및 선체번호 제정안을 작성하고 함명제정위원회와 해군 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통상 진수 한 달 전 결정된 후 진수식 때 선포된다.

■ 해군이 해온 교육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

군함마다 이름을 짓는 기준이 있다. 홍범도함은 1800톤 손원일급 잠수함 중 7번째로 만든 잠수함이다. 손원일급 잠수함은 3번함 안중근함부터는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이름을 붙여, 김좌진함(4번함). 윤봉길함(5번함), 유관순함(6번함), 홍범도함(7번함), 이범석함(8번함), 9번함(신돌석함) 등이 있다.

공교롭게 육사에서 흉상 철거 논란이 벌어진 독립전쟁 영웅 5명 가운데 손원일급 잠수함 이름에 3명(김좌진·이범석·홍범도)이 들어가 있다.

해군은 그동안 홍범도함 승조원들에게 이렇게 교육해 왔다.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보여준 승리의 역사가 우리 바다를 지키는 잠수함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둡고 차가운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잠수함은 어떤 작전보다 은밀하고 고독하다. 그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홍범도 장군의 천둥같은 기백이다. 홍범도 장군은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정신 때문이었다. 홍범도함 승조원 모두가 이러한 독립군의 기개를 본받아 최고의 전투태세를 완비해야 한다”고 교육해왔다. 그동안 해온 교육 내용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부담이 해군에 있다.

해군이 곤혹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함명 제정 기준과 절차는 있지만 폐기, 변경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함명 변경 절차가 없는 것은 국군 창군 이래 군함 이름을 바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해군의 표준을 만든 영국 해군은 한번 정한 군함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퇴역 군함을 외국에 양도하면 넘겨받은 나라가 자국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를 빼면, 국제적으로 군함 이름을 바꾼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 함명 억지 변경, 국격에 도움 안 돼 

군함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나라가 망할 때다. 러시아 흑해함대 기함인 모스크바함은 옛 소련 시절인 1983년에 슬라바급 순양함 1번함 ‘슬라바’로 취역했다가 소련이 망한 뒤 2000년에 개명했다.

다음은 무소불위 독재자가 멋대로 바꾸는 경우다. 나치 독일 히틀러는 2차 대전 때인 1940년 1월에 전함급 군함 ‘도이칠란트’ 이름을 뤼초(Lützow)로 바꿨다. 독일이 영국에 견줘 해군력이 열세인데, 이름이 독일 그 자체인 도이칠란트가 해전에서 격침되면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강제 개명한 것이다.

군함 이름 바꾸기는 나라가 망하거나 전쟁 때 독재자가 해왔지 ‘보편적 국제규범체계’를 따르는 나라들은 좀처럼 꺼리는 일이다.

공연한 홍범도함명 바꾸기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격을 실추시켜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인 ‘글로벌 중추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대부분 육군 고급 장교 출신인 국방부 지휘부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명 변경이 가진 이런 복잡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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