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류재준 “이 세상 모든 어머니께 ‘장엄미사’ 바쳐”

임석규 2023. 8. 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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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국립합창단 50돌 기념 공연
현대음악의 거장 펜데레츠키의 제자인 작곡가 류재준은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 자주 작품을 위촉받는다. 국립합창단 제공

윤의중(60) 국립합창단 단장은 지난해 작곡가 류재준(53)에게 합창곡 창작을 의뢰했다. 올해 국립합창단 창립 50돌을 맞아서다. 마침 류재준에겐 2017년부터 6년째 매달려 온 합창곡이 있었다. 독창과 합창이 딸린 ‘장엄미사’(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였다. 오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80분에 이르는 이 대곡을 세계 초연한다. 국립심포니와 국립합창단, 시흥시립합창단에 소프라노 이명주, 알토 김정미, 테너 국윤종, 베이스 바리톤 김재일 등 정상급 성악가들이 출연한다.

국립합창단이 특정 종교 의식에 쓰는 곡으로 창립 50돌을 기념한다면 논란이 빚어질 수 있는데, 그건 아니다. ‘미사 솔렘니스’는 미사곡에서 가사를 뽑지만, 예배용이 아니라 콘서트용이다. 베토벤이 자신의 최고작품으로 꼽은 장엄미사도, 모차르트, 브루크너가 작곡한 장엄미사도 미사에 쓰지 않는다. 그래도 국립합창단은 ‘크리스테~’란 가사를 ‘주여~’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번역한 자막을 준비했다.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국립합창단은 종교적 내용이란 이유로 연말이면 정례적으로 해오던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지난해부터 중단해야 했다. 윤의중 국립합창단장은 “종교 관련 곡을 빼버리면 합창곡 레파토리는 크게 허전해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25일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선 류재준의 장엄미사 초연을 위한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작곡가는 수시로 지휘자에게 다가갔다. “이 부분은 가벼워야 하는데 너무 무겁다”거나, “비올라가 확실하게 들려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휘봉을 잡은 윤의중 합창단장은 “작곡가 선생님도 계시지만 이 부분은 조금 헛갈린다”고 하자 일제히 웃음이 퍼졌다. 오전에 시작한 연습은 오후 늦도록 이어졌다. 류재준은 “베토벤 교향곡 9번도 초연 때는 지금처럼 연주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작곡가가 곡을 내놓은 뒤에 다듬고 발전시키는 것은 연주자들 몫이라 연주자가 작곡가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류재준은 그 많은 음악 형식 중에 왜 하필 장엄미사에 몰두했을까. “여러 가지로 힘들고 작곡도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뭘 남길까’ 고민했어요.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만년에 쓴 장엄미사가 떠오른 거죠. 믿음과 구원, 용서를 얘기하는 가사는 종교적이라기보다 내면의 성찰을 담은 겁니다.”

그는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작품을 의뢰받았다. 독일과 영국·프랑스·핀란드·폴란드 등지의 공연장과 방송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방송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가 이끄는 ‘서울국제음악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2016년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설상가상으로 ‘림프종’으로 건강마저 나빠져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가 인생의 고빗길에서 시작한 일이 장엄미사 작곡이었던 것. 그는 “솔직히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의식하면서 ‘저보다 잘 써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쓰고 나니 턱도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께 이 곡을 바친다”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작곡을 시작했지만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어요. 그 고통의 끄트머리엔 어머니들이 있더군요.” 그는 “미사 솔렘니스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우리가 모르는 비극에 대해 한 번이라도 눈을 돌리고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의중 국립합창단 단장은 창립 50돌을 1년 앞둔 지난해 작곡가 류재준에게 합창곡을 의뢰했다. 오는 31일 예술의전당에서 류재준의 ‘장엄미사’를 세계 초연한다. 국립합창단 제공

그가 만든 곡들은 현대음악치고는 난해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법이 우수해도 청중이 이해 못 하면 문제죠. 청중이 공감하면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 만든 장엄미사 역시 모차르트, 베토벤의 미사곡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가 음대 다닐 때만 해도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예프는 구세대 음악이라고 비판받았어요. 근데 지금 20세기 음악 하면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음악이잖아요. 라벨도 그렇고요.” 그는 “음악은 사람을 기쁘게 해줘야 한다”며 “‘현대음악 작곡가’가 아니라 그냥 ‘작곡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는 고교 3학년 때 소설 ‘장크리스토프’에 감명받아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다. 그 전엔 악기도, 음악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저는 본능으로 만드는 음악가는 아니에요. 영어를 듣고 국어로 번역하는 거지 네이티브는 아닌 거죠.” 그는 “그래서 제 조카가 너무 부럽다”고 했다.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을 거쳐 올해부터 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활동 중인 클라리넷 연주자 김한(27)이 그의 조카다. 작곡가 진은숙과 마찬가지로 류재준 역시 서울대에서 강석희(2020년 작고)에게 배운 뒤 유럽으로 건너갔다. 진은숙은 헝가리 태생 리게티 죄르지(1923~2006) 문하였고, 류재준은 폴란드 펜데레츠키(1933~2020)의 제자였다.

류재준은 음악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해왔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림바 협주곡’을 작곡했고, 아파트를 소재로 삼은 15곡을 담은 가곡집 ‘아파트’도 발표했다. 2013년엔 작곡가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 음악상’ 수상도 거부했다. 친일파 음악인 이름으로 상을 받기 싫다는 이유였다. 정작 그는 작곡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했다.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일기 쓰듯 음악으로 기록하는 것일 뿐이죠. 신문이 하는 일과 똑같아요. 작곡은 절대로 뭘 이끌거나 선동할 수가 없어요.”

그는 2010년 창단한 ‘앙상블 오푸스’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그가 만든 서울국제음악제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았다. 앙상블 오푸스는 다음달 8일 예술의전당 아이비케이(IBK)챔버홀에서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수정본과 첼로 소나타, 작곡가 최우정의 비올라 소나타와 클라리넷 소나타를 각각 초연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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