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 홍범도…비구니 출신 아내 ‘불 고문’ 견디며 남긴 말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 끼워 고문한 일제
이씨 부인, 승려 홍범도가 독립투사 되기까지
한국 주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폭도’들의 귀순 공작을 강화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작전만으로는 그들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폭도’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개마고원의 넓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 한국인 의병들의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 남편에게 투항하라는 편지 쓰란 협박…“아니 쓴다”
사령관은 1908년 4월30일 자로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출몰하는 ‘홍범도 폭도 무리’를 유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귀관은 순사대를 인솔하고 5월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이르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여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홍범도의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사용할 것”을 명시했다.
임재덕과 김원흥(金元興)은 일본군 103명과 한국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갑산군 창평리 산간 마을에 주둔했다. 총기와 탄약을 넉넉히 지녔고, ‘속사포’라는 기관총 공용화기까지 갖춘 막강한 토벌대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용문동 더뎅이 산골짜기가 지척이었다.
제3순사대장 임재덕은 일진회 간부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일진회 간부 송병준이 고종 폐위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진회를 타도 대상으로 간주했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 의병에게 처단된 일진회원은 무려 9260명을 헤아렸다. 마치 내전 양상과 같았다. 의병과 일진회는 총을 맞대고 겨누는 적대세력이었다.
또 한 사람 지휘관 김원흥은 대한제국의 고급 장교 출신이었다. 옛 한국군 참령 계급장을 달았던 고위 군사간부로서 북청진위대 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기꺼이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감부 예하 경찰 조직에서 경시 계급을 부여받고 반일 의병운동을 탄압하는 최일선에 서게 됐다.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끔찍한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의병 지도자를 전향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해방운동의 투사를 정신적·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행위였다.
홍범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인필골, 깊은 산중 마을이었다. 처가 동네였다.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을 토벌대 주둔지로 압송해 왔다.
홍범도의 귀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홍범도여,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와 같이 위협하는 데 쓸모 있는, 인질들이었다.
■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공작은 일본제국의 귀족 시스템 속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최상층 귀족이었다. 망국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조선인 고관대작 중에서 어느 누구도 공작 작위까지 오르지 못했다.
회유에다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글을 쓸 줄 모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할까, 거절할까.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랴.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그날 아내가 입에 담았던 말을 홍범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던 것 같다. 평생토록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렇게 말했노라고, 노년의 홍범도는 또박또박 기억해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정확히 댈 수는 없지만, 아마 30대 후반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부 학자는 이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전한다. 북간도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하니 전혀 불신할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 출가했던 두 사람의 만남
이씨 부인이 홍범도와 부부가 된 것은 기이한 인연 덕분이었다. 처녀 때 그녀는 비구니였다. 동기는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찍부터 북청 산골의 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도 승려였다. 금강산 유명한 사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 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 바로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했다. 가정을 이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여인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 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아들 둘을 얻었다.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성화에 힘입어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나 노년기의 일이었다.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물러설 인간들이 아니었다. 토벌대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냈다. 이씨 부인이 남편에게 직접 쓴 글인 듯 꾸민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몸에 지닌 채 심부름꾼이 의병부대 주둔지 용문동 더뎅이로 파견됐다. 하지만 산속으로 올라간 사자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틀 동안 여덟 차례나 사람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 ‘17살 의병’ 장남 홍양순의 전사
토벌대 집행부는 홍범도의 맏아들 홍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홉 번째 사자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 편지를 지니게 한 채 산속으로 올려 보냈다.
홍양순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의병 지휘부로 쓰는 집의 문 앞에 섰다. 홍범도는 격분했다. 아버지를 망치는 일에 아들이 가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났다. 부관이 급히 뛰어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총알은 귓바퀴를 맞히고 지나갔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아니었던가. 500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그만 동전을 맞히는 귀신같은 사격술을 익힌 홍범도였다. 격발 순간에 손가락이 떨렸음이 틀림없다.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 고뇌가 작동했던 것 같다. 총알은 미세한 각도로 빗나갔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세했다. 17살짜리 소년 의병이 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함흥 신성리 전투, 통패장골 쇠점거리 전투, 하남 안장터 전투, 갑산 간평 전투, 구름을령 전투, 괴통병 어구 전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 등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홍양순은 1908년 6월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는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씨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운명은 길지 않았다.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 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짜놓은 매복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해 군경 209명이 포로로 잡혔다.
■ 친일파 처단하며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⑦ ‘탈초 홍범도 일지’,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 70쪽, 2014년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생중계] ‘김건희·50억클럽 쌍특검’ 재표결…국회 현장을 가다
- 1만원 사과, 농민은 ‘모르는 일’…그 돈 누가 다 벌었나
- 세계 언론 기함한 0.72 출산율…‘성차별·장시간 노동’ 지적
- 물가 3.4% 뛰는데 근로소득 1.5%↑ 그쳐…실질소득 ‘마이너스’
- 기동민·안민석·홍영표 컷오프, 그 자리에 ‘이재명 영입인재’
- 복지부 “전공의 어제 294명 복귀…오늘이 마지막 날”
- “자제분을 저희 회사에 주십쇼”…일본은 구직자가 ‘슈퍼갑’
- 지역 국립대 의대교수 1000명 더 늘린다
- [현장] 잘린 부리, 분변 악취…문 닫힌 지하동물원의 비극
- [단독] 이재명, ‘경선 조사업체 선정 과정’ 감찰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