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판에 일절 대응 말고 기다려라”…노무현식 정면승부
2003년 7월23일(수) 3시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토론했다. 안충영, 박태호 교수, 한덕수 산업연구원장(나중에 부총리, 총리), 그리고 경제단체장으로 박용성, 김재철, 김영수 회장이 참석했다.
회의가 끝났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 사회를 보던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모처럼 오셨으니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 있으면 하세요”라고 권하니 박용성 대한상의회장이 “정책이 불확실하니 큰 그림을 빨리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언짢은 기색으로 “아니 이미 다 제시했잖아요. 과거 우리만큼 제시한 정부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박했다. 이어서 “정책실장하고 나하고 네덜란드 모델 이견 없는데 언론은 딴소리하고, 삼성전자 공장 증설도 균형발전을 위해 지방부터 좀 살리고 해줄 테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했는데…”라고 울분을 한참 토로하다 끝에는 감정을 드러내 미안하다고 했다. 조윤제 보좌관이 “그래도 잘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웃으며 일어섰다.
8월2일(토) 아침 8시 장관 워크숍에서 언론 문제를 주제로 오홍근 전 국정홍보처장이 강연했다. 과거 군사문화 청산을 주장하는 칼럼을 썼다가 군인들한테 끔찍한 식칼테러를 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당시 언론사 임원들은 오히려 군부에 물의 일으킨 것을 사과했다고 하니 정말 무법천지, 암흑시대였구나 싶었다.
노 대통령이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를 하던 시절 요트 타는 게 취미였는데 이걸 조선일보가 문제 삼았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초대형 요트도 있지만, 노무현 변호사의 요트는 소형 돛단배에 불과했다. 호화요트인 양 기사화해 인권변호사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한 악의적 보도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조선일보와 오래 싸웠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보수언론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원칙적 자세를 견지했다.
대부분 대통령이 언론에 할 말이 있어도 참고, 사이좋게 지내 정부 비판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는 점점 비굴해지고, 언론은 갈수록 힘이 세져 소위 ‘밤의 대통령’이라는 언론인도 출현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언론에 굴하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용감히 싸웠다. 정정보도 요청 등 언론과의 전쟁에 선봉장을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참여정부 5년 내내 언론과의 전쟁 포성이 그치지 않았다. 보수언론은 참여정부를 조롱하고, 무능한 아마추어라서 나라를 곧 망칠 것처럼 공격해댔다. 참여정부에 시종일관 비협조적, 비판적, 냉소적이었다. 노 대통령은 장관, 참모들에게 언론의 횡포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으나 사실 언론은 버거운 상대였다. 윤영관 외교부 장관은 “국회와 기자만 없으면 장관 할만한데…”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언론과의 5년 전쟁에서 보람도 있었다. 최대의 전과는 신문 가판 폐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가판 신문이란 게 있었다. 조간신문의 경우 그 전날 저녁 7시쯤 가판이 나온다. 처음 찍은 초판, 2판에 해당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40판, 50판 신문이 배달된다. 신문사에서 보도 내용을 밤새 수없이 수정한다는 뜻이다. 가판은 철도역, 지하철, 버스정류장, 동네슈퍼 등에 뿌려졌다. 빠른 뉴스를 원하는 독자들은 저녁에 다음날 신문인 가판을 찾아 읽었다.
고위 관료들은 가판에 자신이 담당하는 업무와 관련한 불리한 기사가 나지는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혹시 불리한 기사가 있으면 즉각 식사 중단, 작전 개시다. 신문사에 연락해 기사 삭제나 표현 수정을 부탁한다. 이런 부탁이 통하려면 평소 술자리, 골프, 향응 등으로 친분을 유지해둬야 한다. 친소 정도에 따라 수위가 조절된 보도가 이튿날 아침에 깔린다. 이걸 잘하는 관료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벌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가판에 실린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것은 공무원과 대기업 홍보파트 임직원들의 능력 지표였다. 이런 가판 관행은 신문사를 일방적으로 우위에 서게 만드는 무기가 됐다. 신문사는 ‘갑’이고, 관계, 재계는 ‘을’이었다.
노 대통령이 이 잘못된 관행을 일격에 깨부쉈다. 어떻게? 공무원 전체에 지시를 내렸다. 가판 대응하면 문책하겠다. 가판에 일절 대응하지 말고 다음 날 조간 나오기를 기다려라. 혹시 조간에 오보가 나면 그때 정면 대응하고, 언론의 비판이 옳으면 공무원들이 잘못을 고쳐라. 즉 신문 논조를 유리하게 조절하려고 애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언론을 대하라. 그야말로 노무현식 정면승부였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관료들이 가판을 안보니 저녁 식사 시간이 즐거워졌다. ‘저녁이 있는 삶’이 돌아왔다. ‘을’이 가판을 아예 보지 않으니 ‘갑’은 당황했으리라. 가판이 위력을 잃으니 가판 자체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결국 가판은 사라졌다. 가판 폐지는 큰 개혁이었다.
노 대통령의 독특한 언론관 덕분에 나는 덕을 많이 봤다. 과거 정부에서 장관이나 참모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면 경질은 시간문제였다. 별로 잘못한 거 없어도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소위 ‘정권에 누를 끼친다’는 해괴한 논리로 경질 대상이 됐다. 그래서 억울하게 밀려난 사람이 부지기수다. 정부에 들어가 일한 학자는 대개 단명이거나, 장식용이거나, 이름을 더럽히거나, 언론 포화에 낙마하거나, 심지어 감옥에 가거나 했다. 그래서 학자 출신으로 깨끗한 이름을 유지한 사람이 매우 드물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일한 덕분에 학자의 오거지악(五去之惡)을 면했으니 행운아다.
국민의정부 때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교수는 한국 정치학계의 태두다. 그가 위원장이던 시절 대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정부 안에 학자 출신이 거의 없어 외롭다고 했다. 최 교수는 그나마 위원장을 오래 못하고 밀려났다. 그가 쓴 학술논문에서 6·25 전쟁이 북한으로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고, 내전 성격이 있다고 쓴 것을 월간조선이 앞뒤 문맥을 자르고 표현을 꼬투리잡아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이 계속되자 결국 최 교수는 사표를 냈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그렇고, 6·25도 그렇고 내전 성격이 있다는 건 일리 있는 말이다.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종북좌파로 몰면 곤란하다. 이런 상식적인 말을 문제 삼아 당대 석학을 밀어내는 보수언론의 횡포를 보면 우리가 이성을 가진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2003년 5월31일(토) 밤 9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한국방송(KBS) 심야토론 ‘참여정부 100일’에 출연했다. 심야토론에는 이호웅, 권철현 의원, 이창동 장관, 박원순 변호사, 이각범 교수가 같이 출연해 개혁 유지냐, 후퇴냐, 정책의 일관성 문제, 인사 문제 등을 토론했다.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은 참여정부가 시민들에게 청와대를 선심 구경시켜준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았다. 토론 진행자인 길종섭 아나운서, 왕현철 피디(PD)와 인사를 나누었다. 왕 피디는 경북대 불문과 77학번이라고 해서 반가웠다. 그는 청와대 수석이 수행원 없이 혼자 방송국에 나타나는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밤늦은 시간에는 혼자 버스, 택시로 다녔다. 교수 시절 버릇이고 그게 마음 편하다. 그해 추석 대구에 내려가 명절 음식을 잔뜩 받아 아내와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다. 긴 줄을 서서 택시 타고 집에 갔는데 그걸 조선일보 기자가 우연히 본 모양이었다. 다음 날 가십난에 대통령 정책실장이 관용차 대신 택시 타더라는 기사가 조그맣게 났다. 기사를 보고 내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양손에 음식 보따리를 들어 택시 탔지 안 그랬으면 버스 탔을 거다. 버스 타는 거 봤으면 그 기자 기절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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