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애제자가 무력한 '잠'에 빠진 한국영화계를 깨울까?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인간의 기본 3대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 중에서 수면욕은 가장 강한 욕구라고 알려져 있다. 성관계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먹는 것도 여러 날 굶어도 살 수 있지만, 잠은 며칠만 자지 못해도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다.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법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데 잠을 자는 것 자체가 두려운 행위가 된다면 어떨까. 영화 '잠'(감독 유재선)은 지극히 일상적인 수면을 공포의 소재로 선택해 불안과 긴장, 공포를 만들어낸다.
사이 좋은 부부가 있다. 남편 현수(이선균)는 TV 드라마에 간간히 단역으로 얼굴을 비추는 연극배우이고, 아내 수진(정유미)은 그런 남편을 응원하며 식품회사에 다닌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낡은 아파트지만 집안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라는 글귀가 가훈으로 걸려 있을 만큼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넘쳐 흐르고, 부부는 곧 출산할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누가 들어왔어." 어느 날, 잠들었던 현수가 중얼거린 이상한 말을 기점으로 사이 좋은 부부의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 현수는 잠만 들면 기이한 행동을 벌인다. 피가 나도록 얼굴을 긁어대고, 냉장고에 있는 날고기와 날생선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급기야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도 한다. 병원에서는 렘(REM) 수면행동장애 진단을 내리고 약 처방과 함께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지만, 이를 빠짐없이 지켜도 현수의 기이한 행동은 나아지지 않는다. 남편은 남편대로 스스로가 두려워지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과 태어날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눈에 핏발이 선다.
'잠'은 누구에게나 일상적인 소재인 잠과 누구에게나 안식의 공간일 집을 불안으로 물들이면서 깊은 공감과 강력한 공포를 선사한다. 잠을 자다 잠꼬대를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필자도 한때 술을 마시고 자면 중간에 일어나 어딘가 불편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꺾은 채로 팔을 휘휘 저으며 거실을 맴돌곤 한다는 룸메이트의 두려움 섞인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룸메이트야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관계를 청산할 수 있지만, 현수와 수진은 한 침대에서 함께 잠이 드는 부부 사이다. 가까이 있는 것이 두려워지는 공포의 대상이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부부라는 점이 이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에 아이까지 태어나며 아내 수진의 심리상태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잠'은 누구나 공감가는 설득력 있는 소재와 전개 방식으로 관객들을 쫀쫀한 몰입감에 빠지게 만든다. 94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3개의 장을 거치는데, 각 장마다 현수와 수진의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한다. 그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도 극적으로 변화하고, 그에 따라 공간도 변하고, 장르마저 스릴러와 공포, 오컬트를 오가고 곳곳에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의 양상을 띠는 등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인다. 부부가 중심이요, 집에 메인 공간인 단조로운 구성이 절대 단조롭지 않게 느껴지게 만드는 편집과 미술, 사운드 등 연출의 힘이 돋보인다. '옥자'에서 연출부 경험을 쌓은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에 대해 봉준호 감독이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이자 스마트한 데뷔 영화"라 호평을 남긴 것은 물론, 스페셜 GV 행사에도 참여하며 힘을 실어줄 만하다.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을 시작으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의 이어지는 러브콜도 '잠'에 대한 기대치를 키운다.
이야기와 연출의 힘도 힘이지만, 무엇보다 눈에 드는 건 연기. 단단한 연출을 기반 삼아 두 주연배우가 제대로 판을 벌인다. 그간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등 홍상수 영화의 작품 3편에서 짧게 호흡을 맞췄던 이선균과 정유미는 '잠'에서 기가 막힌 호흡을 선보인다. 이선균이 자상한 남편의 모습과 수면 중 기이한 행동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모습으로 먼저 시선을 붙들면, 사랑스럽고 강인한 아내였다가 출산 이후 광기에 휩싸이는 정유미가 공포의 극단으로 관객을 몰아넣는 형국이다. 두 배우 모두 극과 극의 폭 넓은 연기를 유감없이 소화하는데, 특히 장르의 변주와 함께 신들린 듯 광기를 표출하는 정유미의 열연은 여러 번 칭찬해도 아쉬움이 남을 정도.
영화의 엔딩 또한 여운이 남는다. 유재선 감독이 "봉준호 감독님이 엔딩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했는지에 대해 누설하지 말라는 팁을 주셨다"라고 말했을 만큼,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한 엔딩으로 영화 관람 후 관객들의 대화가 풍성해질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의 현실적인 공포, 결혼과 부부의 의미 등 곱씹을 여지 또한 충분하다.
'잠'이 무력한 잠에 빠진 듯 좀처럼 기세를 보이지 못하는 한국영화계에 날카로운 외침이 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비싸진 영화 티켓값으로 확실한 만족을 담보하지 못하면 좀처럼 극장을 찾지 않는 관객들의 지갑이 이 독창적인 데뷔작에 흔쾌히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 15세 관람가, 9월 6일 개봉.
Copyright © ize & iz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알쓸별잡’, 여행예능 DNA 되찾고 이과감성 더한 지식백화점 - 아이즈(ize)
- 최수영, '남남'의 진희로 알게 된 멈춤의 중요성 - 아이즈(ize)
- '잠' 이선균 "전혜진과 '군대 동기' 같은 부부" [인터뷰] - 아이즈(ize)
- '힙하게' 한지민-이민기, 공조수사 최대위기 발생 - 아이즈(ize)
- '경이로운 소문2' 강기영-진선규, 악의연대기 끊어지나? - 아이즈(ize)
- '소경국' 공승연, 폭발물 제거 성공하나? - 아이즈(ize)
- '연인' 남궁민, 왜 감옥에 갇혔나? 산 넘어 산 - 아이즈(ize)
- '마스크걸' 안재홍, 망설임 없이 주오남을 택한 이유 - 아이즈(ize)
- '연인', 평정심을 잃지 않던 남궁민이 놀란 이유는? - 아이즈(ize)
- 40주년 맞는 정지영 감독 '회고전' 영국에서 최초로 열린다 - 아이즈(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