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머리를 만지던 그 여인들은… [본헌터⑲]
쪽진머리속의 장신구들은 어떻게 설화산 구덩이에서 나왔나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나는 비녀다.
한 여인이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 아침의 시작이다. 두 손을 올려 머리를 묶고 쪽을 진 뒤 나를 꽂는다. 나, 은비녀를 꽂는다. 그렇게 나는 여인과 하나가 되었다. 그날 밤 여인은 다시는 머리를 풀지 못했다. 머리에 손도 대지 못했다. 나는 그저 여인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었다.
나는 설화산 은비녀1이다. 내맘대로 정한 식별번호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현 수철리 174-1번지) 설화산 8부능선의 구덩이에서 나는 발견되었다. 2023년 3월 성재산에서 A4-5가 완전유해의 모습으로 노출될 때 버클과 단추와 동전 등 수많은 유품들이 나왔다. 그 다음달 황골 새지기에서 새지기2-2가 발굴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와 내 동료들은 성재산과 새지기의 유품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내가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지표면 밖으로 노출된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여인과 함께 땅에 묻혀 오래도록 한 자리에 있은 지 67년 만이었다. 나는 한 다발의 머리카락과 함께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머리카락은 짓뭉개져 사라진 머리뼈와 이별하였으나, 나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카락과 함께 나온 비녀가 아홉이나 되었다. 나는 아무 문양과 장식이 없는 민무늬 은비녀였다. 길이는 111.7㎜, 두께는 6.3㎜였다.
가장 큰 특징은 88.6㎜의 귀이개를 동생처럼 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인은 내 밑에 은 귀이개를 꽂아놓았다. 머리카락 없이 홀로 나온 비녀도 예순 일곱, 조각으로 나온 비녀도 스물 두 개였다. 쪽진 머리 속에 꽂혀있다가 땅 속에서 헤어졌는지, 아니면 여인의 손이나 주머니 속에 웅크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녀의 총 수는 아흔 여덟이었다.
그러니까, 한 두 명이 아니었던 셈이다. 여인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장면을 다시 상상해본다. 누군가는 원문양 비녀를 꽂고, 누군가는 꽃무늬 비녀를 꽂는다. 누군가는 플라스틱 비녀를 꽂고, 누군가는 옥비녀를 꽂는다. 아, 옥비녀는 갓 결혼한 처자의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침에 비녀를 한 여러 마을의 여인들이 다함께 어떤 장소에 갇힌다.
나는 누구인가. 여인들의 장신구다. 그 옛날 혼인 여부를 드러내던 표식이자 모양과 장식을 통해 기호와 취향을 드러내던 예술품이다. 과거 여성들은 혼인을 하면 길게 땋았던 머리를 올려 얹었다. 머리를 고정시키려면 비녀가 필요했다. 한번 고정시키고 나서 머리가 빠지지 않도록 한쪽 끝은 뭉툭하게 만들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겼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비녀를 꽂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을 하대하는 풍습이 존재하던 시대다.
비녀들과 함께 쌍가락지 등 20개의 반지, 1개의 팔찌도 나왔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머리카락에 붙어 나온 귀이개는 무엇인가. 귀이개는 내가 발견된 곳에서 총 여섯이 나왔다. 귀이개는 머리 반대쪽이 뾰족했다. 귀지를 파내기도 하지만, 음식을 먹고 체하거나 다른 응급상황에서 손을 따 검은 피를 보게 하는 데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대부분 장신구이면서 생활용품이었다. 나를 사용한 여인은 얇아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귀이개를 잃어버리지 않고 제때 야무지게 쓰기 위해 머리에 꽂아놓았을까.
눈이 오면 눈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설화산이다. 1951년 1월6일, 그날도 몹시 추웠다. 아름다운 설화산에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오후 5시경 아산의 온양, 배방, 신창의 마을에서 모인 여인들이 설화산을 향해 걸어올라간다. 나를 발굴한 사람들이 낸 통계에 기대어, 그날 설화산으로 올라가던 성인 여성들의 수를 86명으로 추정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기혼 여성이고 머리에 비녀를 꽂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6~9살 어린아이가 60명이라고 추정한다. 여기에 비해 어른 남성은 22명에 불과했다고 추정한다. 남성들의 평균 키는 161~162㎝, 여성들의 평균 키는 140~143㎝였다고 추정한다. 발굴된 유해를 근거로 할 때, 남녀 합쳐 208명이었다. 여성 비중이 압도적인 행렬이었다. 그 옆에서는 총을 든 장정들이 함께 갔다.
여인들의 뒷모습을 가까이 따라가본다. 어떤 기혼자들에게는 비녀가 없다. 본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여인들은 비녀를 뽑고 머리를 풀어 늘어뜨렸다. 슬픔과 죄책감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행위였다. 자신의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누군가는 비녀를 뽑아 머리를 풀어헤쳤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럴 정신도 없이 황망한 마음으로 비녀를 꽂고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마음을 다져먹으며, 비녀가 뽑히지 않도록 머리를 더 단단히 만졌을지도 모른다. 나를 그대로 꽂아둔 여인은 황망해서였을까, 마음을 더 다져먹어서였을까.
2018년 3월 나를 찾아준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보낸다. 그해 2월20일에서 4월1일까지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40일간 이들은 미끄러운 산길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힘겹게 오르내리며 곡괭이와 삽과 호미로 땅을 팠다. 눈을 치우고 비와 바람을 막으면서 뼈와 유품을 수습해 세상 밖으로 알렸다. 2017년 11월에는 설화산 남서면 3부 능선자락에서 한참이나 허탕을 치기도 했다. 마을 뒷산 설화산 폐금광의 20m 이상 수직갱도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했다는 증언에 따라 그곳을 중심으로 파헤친 결과였다. 헤매고 헤매다가 우리가 있는 곳 근처에서 불에 탄 머리뼈 조각과 M1 탄피 하나를 발견하면서 발굴 작업이 탄력을 얻었다.
우리는 굴이 아니라 바닥이 항아리 모양인 큰 구덩이 안에 있었다. 구덩이 경사면을 따라 유해와 유품들이 5층으로 뒤섞여 쌓여있었다. 층 사이에는 마사토와 진흙, 잡석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4층의 일부 뼈들은 그을린 상태였다. 뼈들은 서로 뒤엉켜 있어 하나씩 식별할 수가 없었다. 보존상태도 최악이었다. 이곳에서 모두 3246점의 뼈가 발굴되었다. 머리뼈 조각, 치아, 등뼈, 손가락뼈, 발가락뼈, 허벅지뼈를 맞춘 결과 앞에서 추정한 208명이 나왔다. 아이들의 유해는 여인들의 유해와 함께 뒤섞여 출토되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죽었으리라. 상당수가 부서진 위아래턱에 치아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귀를 보자고 한다. 아이는 싫다고 한다. 엄마는 아이를 당겨 앉히고 쪽진 머리에서 귀이개를 뽑아 들이댄다. 아이는 간지럽다고 앙탈을 부리며 자꾸만 피한다. “어유 착해라. 이리 온.” 엄마는 어르고 달래면서 아이의 귀에서 귀지를 살살 긁어낸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쪽진 머리 곁에서 경험한 여인의 평화로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던 엄마와 아이 모두 설화산의 구덩이로 끌려가 미친 최후의 시간을 보냈다. 구덩이에서는 M1소총과 카빈소총 탄두가 각각 47개, 15개 나왔다. M1과 카빈의 탄피가 각각 42개와 38개 나왔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모두 가까운 거리에서 이 소총에 맞아 죽었다. 사살의 명분은 1.4 후퇴였다.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딱지였다.
발굴단원들이 가장 가슴 아팠을 때는 뒤엉킨 어린아이의 뼈와 큰 돌에 눌려 형태를 잃어버린 어르신들의 머리뼈를 수습할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를 수습할 때였다고 한다. 홀로 고립된 은비녀로서의 내가 아니었다. 쪽진머리와 은귀이개와 함께 있던 나였다. 우리 운명공동체 셋은 한국전쟁에서 여성들의 희생과 수난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로 남았다.
그날, 비녀를 꽂은 여인들은 설화산에도 왔지만 성재산에도 갔다. 주성이라는 아이가 떠오른다. 곡물창고에 갇혀있다 살아남아 성인이 되어 미국에 갔던 주성은 내가 발굴되던 2018년 설화산에 왔다. 주성은 내가 있던 곳에 엄마가 묻혔다고 믿었다. 주성아, 네 엄마는 설화산이 아니라 성재산에 갔단다.
<다음 회에 계속>
※ 이 글은 ‘충남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유해발굴 조사보고서’(아산시·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를 참고해 썼음을 밝힙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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