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서비스 공백 해결사 ‘지역공동체’ 부상
마을의 유일한 소매점 문 닫자
동락점빵 만들어 생필품 판매
자연부락 찾는 이동점빵 운영
주민들 ‘구매 난민’에서 벗어나
시설 부족 지역 대안으로 주목
체계적 지원 위한 법률 제정도
“동락점빵 이동점빵이 왔습니다. 설탕·커피·물엿·액젓·간장·화장지·콩나물·두부·음료수를 갖고 왔습니다.”
18일 오전 11시 전남 영광군 묘량면 효동마을회관 앞에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생필품을 잔뜩 실은 트럭이 마을회관 공터에 자리 잡자 어르신들이 유모차를 끌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커피 한상자 얼마야?” “2만5000원이요.” “만원밖에 없는데.” “지난번 공병 팔고 장부에 달아놓으셨잖아요. 그걸로 계산해드릴게요.” 여느 구멍가게와 같은 대화가 오간다.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이동점빵은 매주 목·금요일 묘량면 42개 자연부락을 누빈다. 하루 21개 마을을 정해진 시간에 들러 생필품을 공급한다.
이동점빵의 시작은 2011년, 당시 묘량면 유일 소매점이 문을 닫은 게 계기였다. 주민들은 장을 보려면 읍내까지 차로 30분을 가야 했고 자가용이 없는 어르신들은 졸지에 ‘구매 난민’으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이번엔 슈퍼가 사라졌네’ 한탄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해법을 고민한 건 이런 상황이 낯선 귀촌인들이었다. 바로 여민동락공동체다. 여민동락은 2007년 무렵 묘량면에 자리 잡은 6명의 귀촌인이 소박한 생태 기반 공동체를 지향하며 결성한 조직이다.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자는 것이 이들의 철학이었고 1년간 지역조사 끝에 처음 시작한 게 노인복지센터 운영을 통한 재가노인복지서비스 제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금세 예상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당초 2100명이던 면 인구가 점점 줄면서 마을의 서비스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매점도 그중 하나였다. 애써 자리 잡은 마을의 소멸을 목격한 이들은 2011년 ‘구매 난민을 위한 농촌 사회서비스형 유통사업’을 해보자는 포부로 4평 남짓 동락점빵을 만들고 생필품을 도매로 떼다 팔기 시작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들을 위해 이동점빵도 운영했다. 주민들이 구매 난민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당초 여민동락이 사업단을 꾸려 운영하다 2014년엔 별도의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이 결성됐는데 이 선택이 동락점빵의 지속성을 높이는 데 주효했다. 권혁범 여민동락 대표는 “현재 조합원은 395명으로, 이 중 가족 구성원이 있고 씀씀이가 큰 젊은 조합원들이 이용해줘 점빵이 유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민동락은 2009년엔 폐교 위기에 놓인 묘량중앙초등학교 살리기 활동을 통해 12명이던 전교생수를 2019년 100여명까지 늘리는 성과도 냈다. 덕분에 귀촌인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인근 지역과 달리 인구가 완만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역이 사라지지 않고 버티는 방법을 주민들이 찾아낸 결과다.
전국 농촌이 묘량면 같은 상황에 놓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면 지역 20%에 세탁소·목욕탕·음식점이 없다. 미용실이 없는 곳도 13%나 된다. 시장은 관심 없고 정부는 감당하지 못해 농촌에서 인구감소에 따른 서비스 공백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메울 대안으로 여민동락 같은 지역공동체가 주목받는다.
최근엔 이들 공동체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농촌 공동체 기반 경제·사회 서비스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내년 8월 시행한다. 법 제정으로 지역에 부족한 서비스를 공급하는 공동체에 활동비와 재료비 등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김정섭 농경연 선임연구위원은 “주민들이 지역문제를 직접 찾아 해결하면 지원하는 방식으로 농촌 정책이 전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다만 법 제정만으로 당장 전국에 묘량면 같은 대안 공동체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농촌엔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권 대표는 “농촌은 최소한의 생활시설과 돈벌이 수단, 즉 토대가 붕괴했다”면서 “다른 사업과 연계해 주택·생활비 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위원은 “일본은 총무성이 연 6000명 규모의 지역부흥협력대를 운영하면서 도시민 등을 계약직 공무원 신분으로 채용해 농촌 부흥 활동에 나서도록 한다”면서 “우리도 시설 확충을 위한 ‘보조금’ 정책에서 벗어나 사람을 지원하는 ‘보조인’ 정책으로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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