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와 약자의 권력관계[요즘 어른의 관계 맺기](6)
“직원 바꿔”, “제가 직원인데요”, “직원 바꾸라니까”, “직원이니까 말씀하세요. 그런데 왜 반말하시는 거죠? 제가 여자라서 그런가요? 아니면 전화 거신 분이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요? 그것도 아니면 상급기관이라고 그런 겁니까?”
‘직원 아닌 직원’은 아내다. 아내는 1980년대 후반 금융기관에서 일했다. 당시 ‘하늘 같은’ 감독기관에서 전화를 받았고, 다짜고짜 반말하는 이유를 묻자 상대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부서장 호출이 있었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이가, 남성이란 사실이 권력이던 적이 있었다. 어린 여성이 바른 소리를 하면 ‘여자 주제에 건방지다’는 소릴 들어야 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강자와 약자의 권력관계다. 상사와 부하, 부자와 빈자, 중앙부처와 산하기관, 사용자와 노동자, 구매자와 판매자, 심지어 선생님과 학생, 부모와 자식도 그렇다. 권력관계에서는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 서열과 위계가 만들어진다. 힘이나 돈, 영향력에 의해 수직관계, 상하관계, 주종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부분 강자는 약자 여럿을 거느린다. 강자 하나에 약자는 다수다. 강자는 약자들을 평가하고, 그중에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에 반해 약자는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강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도태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산다. 강자가 약자의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약자의 비애고, 누구나 강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강자는 힘이 커질수록 강자로서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회사 조직에서 부서장일 때보다는 임원일 때, 임원일 때보다는 사장일 때 잘릴 확률이 높다. 힘을 가질수록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고, 그럴수록 역할을 달성하기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올라갈수록 힘센 사람의 눈에 띄게 돼 작은 잘못도 숨길 수 없게 된다. 힘이 강해질수록 더 위험해지고 그 지위를 누릴 시간은 얼마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강자는 늘 강자가 아니다. 약자도 마찬가지다.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역전과 패자부활이 가능한 것이 민주주의다. 강자는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기에 겸손하고, 반대로 약자는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분발할 수 있다. 강자는 또한 누군가에게는 약자이고, 약자 역시 누군가에게는 강자일 수 있다. 따라서 세상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업신여길 수 있는 대상도 없다. 강자와 약자가 사슬처럼 엮여 있을 뿐이다.
강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아량이 아닐까 싶다. 강자는 베풀어야 한다. 모든 관계에서는 거래가 일어난다. 거래품목은 돈이나 현물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거나, 사랑과 존경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거래 방식은 다섯 가지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느냐, 먼저 받고 나중에 주느냐, 동시에 주고받느냐,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느냐, 받기만 하느냐이다.
이 가운데 강자는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방식을 택하는 게 맞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거래도 좋지만, 여간해선 오래 가기 어렵다. 아무리 호인이라 해도 베풀기만 하는 건 한계가 있기에 그렇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는 의미는 다양하다. 약자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강자가 먼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약자들이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해 보이는 것, 일이 잘못됐을 때 남 탓하지 않고 자신부터 돌아보는 것, 자기 말을 따라줄 것을 기대하기 전에 자신부터 몸을 낮추고 경청하는 것 등이다.
그 방식이 어떻든 남에게 베푸는 일은 결국 자신에게 베푸는 일이다. 성경에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고 하지 않았나. 혹여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위험부담은 감수할 용의를 가져야 하는 게 강자의 자리다.
그런데 통상 강자는 먼저 받고 나중에 주거나,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기껏해야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주고받기를 동시에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베풂과는 거리가 멀다. 강자는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내가 베풀면 상대도 베풀 것이라는, 사람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약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문제의식과 저항정신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깨어 있어야 한다. 강자는 발언권과 영향력이란 무기를 갖고 있다. 발언권이 세기에 몇몇 강자의 말은 여론이 되고 모든 사람의 말로 둔갑한다. 강자는 조직이라는 방패도 갖고 있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조직을 위해 희생하라고 한다. 강자의 이익에 불과한 일도 모두의 번영을 위해 그래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이기주의자라고 매도한다.
강자는 또한 지금까지 그래왔다며 전통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야 하는 게 우리의 문화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들이 강자가 될 수 있었던 환경을 유지하고 더 강고하게 다지고 싶은 것이다. 이에 응하는 게 구성원의 마땅한 도리라고 말한다. 따르지 않으면 “너는 태도가 글러먹었다”며 약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정당화한다.
약자는 이런 강자의 논리에 휘둘려선 안 된다. 아무리 강자의 요구라 하더라도 모든 걸 들어줄 순 없다. 또 강자의 말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다. 들어줄 수 없는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들어줘선 안 된다.
약자는 또한 누군가에게 입은 피해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거나 대물림하는 방식으로 가해자 대열에 끼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손해와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나부터 부당한 먹이사슬의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아내가 은행 지점에서 일할 때다. 공과금 내는 마감 날, 영업시간이 지났는데도 객장 안은 사람으로 붐볐다. 시간 안에 시재(입출금)를 맞춰야 하는 창구 여직원들은 발을 구르며 수납 업무를 했고, 일부 남직원과 상사들은 뒤쪽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시간 안에 업무를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 아내는 “나 못 해”라는 단말마와 함께 돈통을 객장 안에 던져버렸다. 동전이 사방으로 튀었고, 객장은 일순 조용해졌다.
마감시간이 있음에도 으레 받아주리라 믿고 뒷문을 통해 들어오는 고객과 바쁜 텔러 직원들을 뒤로 한 채 한가하게 노는 남직원들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숙직실로 들어갔던 아내가 30여 분쯤 지나 나와 보니 뒤에서 노닥거리던 직원 모두가 달려들어 업무를 거의 다 처리해놓고 있었다. 이후 아내는 인사 때마다 승진자 명단에서 제외되곤 했지만, 지금도 그날의 돈통 투척 사건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닌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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