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수천명 ‘학살의 역사’… 적막한 산사 위령비만 ‘쓸쓸’ [심층기획-간토대지진 100년, 씻기지 않은 아픔]

강구열 2023. 8. 2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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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전대미문의 공포’… 학살의 기억
“조선인 보면 참살하고 시체 강에 던져… 지혹의 형장(刑場)이었다”
‘조선인 독 풀었다’ 유언비어에
日 군·경·자경단이 무차별 공격
보생사에 조선인 시체 화장·위패
대지진 당일 “조선인 방화 다수” 소문
日 정부·언론이 조장하고 유포 부추겨
“살아있으면 그대로 잔인한 폭력 가해”
각지서 숱한 증언… 참혹한 기억 생생
도쿄도 등 학살 피해자 추모비 20여개
“아픔 함께 나누며 상호이해 다짐하자”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한국인 위령비’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보생사(寶生寺) 앞마당 한쪽에 서 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으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 희생당한 조선인들 시신을 모아 화장하고 위패를 모셨던 이 절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가나가와현 지방본부가 1971년 위령비를 세웠다.

지난 19일 찾은 보생사는 낡고 적막했다. 산 밑자락에 자리 잡아 인적이 드물고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듯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했다. 터 잡은 곳이 그러니 위령비 또한 쓸쓸해 보였다. ‘기억과 평화’라고 적힌 리본을 달고 위령비 앞에 놓인 두 다발의 작은 조화(造花)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누군가는 대재해의 와중에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품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불타고 무너진 건물 잔해 등은 당시 피해의 정도를 보여준다. 대재앙의 와중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간토 지방 각지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독립기념관 제공, 연합뉴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최대규모 7.9의 대지진이 일본 간토지방(일본 혼슈 동부의 도쿄, 지바, 가나가와 등 1도6현)을 강타했다. 사망·실종자만 무려 10만5000여명. 극심한 혼란 속에 조선인 수천명이 일본인에 살해당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질렀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빚은 참혹한 결과였다.

꼭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때의 희생자를 위로하고, 참상을 전하는 추모비가 간토지방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는 참혹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 계승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다. 조선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고 살아 있으면 그대로 린치(불법적인 잔인한 폭력)를 가했다.(중략) 인간이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지옥의 형장(刑場)이었다.”

대지진 당시 요코하마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 참상을 전한 한 일본인의 증언이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한 이런 내용의 증언은 간토 각지에서 전하는 게 숱하다. 도쿄의 한 군인은 일기에 “조선인을 보면 참살해버렸다. 그리고 (시체를) 강에 던졌다”고 적었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고려박물관이 오는 12월까지 개최하는 ‘간토대진재 100년-은폐된 조선인 학살’ 기획전에서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이 공개되어 있다. 대지진 2년 후인 1925년 완성된 두루마리 그림에는 조선인 학살 상황을 묘사한 세 장면이 등장한다. 20여명의 경찰관, 군인, 민간 자경단에 둘러싸여 쓰러진 채 폭행을 당하는 남성, 칼을 든 5∼6명의 군인에 포위돼 피를 흘리고 있는 남성, 거리에서 죽창에 찔려 죽은 사람 등을 그린 그림이다. ‘기코쿠’(淇谷)라는 서명을 남긴 작가는 “전대미문의 공포”라고 표현했다. 박물관은 “학살 희생자를 물건처럼 다루며 조금이라도 빨리 묻어 버리려는 경찰관들의 생각이 읽힌다”며 “사체를 따로 모으고, 추도식을 열기도 한 일본인 피해자에 대한 태도와 차이가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간토지역에 퍼진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가 학살의 단초였다. 대지진 발생 당일 오후 2시쯤 이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의 방화 다수’라는 뜬소문이 돌았고, 4시쯤에는 경찰이 군대의 출동을 요청했다. 다음날 계엄령이 확대되면서 조선인의 폭동, 방화와 관련된 소문은 사실인 양 퍼져나갔다. 대재앙이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람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 일본 정부와 언론이 조장하고, 부추긴 유언비어는 군대, 경찰,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당한 조선인 숫자는 조사주체나 시기에 따라 다르다.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특파원과 조선인유학생이 참여한 조사 결과 6661명이 희생됐다고 1923년 12월 보도했다. 일본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년)는 2613명으로 추정했다.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릿쿄대 명예교수가 당시 기록을 토대로 2003년 추정한 조선인 희생자는 6644명이다. 1923년 사법성이 발표한 233명도 있는데, 이 수치는 군대, 경찰에 의한 학살은 제외한 것이어서 일본 정부가 실상을 알리겠다는 것보단 은폐·축소하려던 작업의 결과라고 보는 게 옳다.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한국인 위령비
◆“아픔의 역사 기억하며 한·일 미래 열어야”

대지진의 혼란을 겪은 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군마현, 지바현 등에는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는 20여개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9월이 되면 주변에서 크고 작은 추모제가 열린다. 대체로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나 의식 있는 일본인들이 행사 주체인데, 지바현 야치요시 관음사(觀音寺) 보화종루는 한국인들이 세운 일본 내 유일한 기림시설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관음사에서는 간토대지진 당시 인근 들판에서 살해당한 조선인을 공양하는 추도제가 1950년대부터 열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모시설 건립이 추진됐고 시민 모금으로 자금을 마련해 1985년 건립됐다.

한국 전통양식으로 지은 보화종루는 ‘간토대진재 한국인 희생자 위령시(詩) 탑’, ‘간토대진재 조선인 희생자 위령의 비’와 함께다. 지난 18일 찾은 보화종루는 주변이 깨끗하고, 위령비 앞에 놓은 지 얼마 안 된 꽃이 놓여 있어 일상적인 관심에서 크게 멀어져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건립문에는 “슬픈 역사를 함께 생각하고 그 숱한 희생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한·일 간의 상호이해와 상호존중을 함께 다짐하자”고 적혀 있다.

올해 유라시아문화연대는 훼손이 심해진 보화종루를 보수할 계획으로 모금운동을 벌였다. 최유진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는 “국내 모금, 관음사, 도쿄 신오쿠보 한인 상인회 등이 힘을 합쳐 7000만원 정도를 모아 보수공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며 “지금도 이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00주년 행사들이 우리 스스로 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1973년 세운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서는 해마다 추도제가 열린다.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예년보다 큰 추도제를 개최할 계획이다. 추도제를 후원하는 주일한국대사관 관계자는 “100주년이라는 점을 특별히 기념할 것”이라며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을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요코하마·야치요=강구열 특파원, 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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