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자유’가 없는 대통령, ‘자유’만 있는 대통령

임지현 서강대 교수·역사학 2023. 8. 2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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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대통령 연설, 자유는 ‘금기어’
10만명 운집했던 북 능라도에서 ‘민족’만 강조하며 ‘자유’는 배제
극단적으로 가면 끝은 파시즘

이승만 토지개혁 성공 비결은 사회민주주의 조봉암 중용 덕분
자유민주주의 3.0 기대한다
문재인(맨 왼쪽)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밤 평양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에서 집단 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연설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남쪽 대통령’으로서 김정은 위원장 소개로 인사말을 하게 되니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옆으로 부인 김정숙 여사와 김정은, 부인 리설주가 차례로 앉아 있다./연합뉴스

나는 불행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난폭한 추상의 이념이 소소한 일상을 윽박지르는 현실정치 때문이다. 자유를 모르는 문재인 정권과 자유만 아는 윤석열 정권이 양극의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의 이념적 폭력 앞에서는 누구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평양에서 발표한 남북 정상 합의문, 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사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는 ‘자유’가 없다. ‘촛불혁명’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자유는 없었다. 소설가 현길언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연설에서 자유는 ‘금기어’였다.

특히 10만이 넘는 북한 청년들이 운집한 능라도 경기장의 연설에서 그는 북한 정권의 민족적 자긍심을 상찬하며 자유를 지워버렸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과 자긍심을 위해서라면 자유는 무시해도 좋다는 메시지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문 대통령의 반인권적 자유관은 민족이라는 ‘대아’를 위해 개인의 자유라는 ‘소아’는 희생할 수 있다는 개발 독재의 이데올로기와 결을 같이 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논리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그 귀결은 파시즘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집요하게 ‘자유’를 배제한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부채는 역사적 청산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자유’가 없는 전임 대통령도 위험하지만, ‘자유’만 있는 현직 대통령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반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취임사 이래 윤석열 대통령의 주요 연설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유산인 ‘양극화와 사회 갈등’의 해법이 ‘자유’를 확대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며 30번 이상 자유를 언급한 그의 취임식 연설은 19세기적 자유주의로 후퇴한다는 의구심도 든다. 사회적 대타협이나 경제정책이 아니라 자유가 양극화를 해소한다는 생각은 너무 이념적으로 치우쳤다.

자유민주주의가 최고선이라고 이상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빈자들의 사회적 생존권을 부정한 19세기 자유주의, 조잡한 행복과 기계적 평등을 강요한 20세기 공산주의, 혈통적 민족집단의 배타적 복지만을 강조한 파시즘과 비교하면, 당장 더 나은 선택지도 없다.

경험론적으로 볼 때, 자유민주주의는 완벽한 차악의 제도이다.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건강한 긴장 덕분에 활력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내용을 갱신하고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의 생산적 긴장 관계를 일방적으로 해소해버릴 때, 자유민주주의는 갱신의 활력을 잃고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 민주의 생산적 경쟁을 통해 커왔다. 애국계몽운동 이래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건국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추동한 한반도의 합리적 중도/보수 정객들은 자유와 민주의 모순된 결합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일제의 식민 통치 당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협동전선인 신간회를 주도한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과 민족의 정치적 자유와 민중의 사회적 생존권을 동시에 역설한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정치적 구상은 자유가 없거나 자유만 있는 두 대통령과 거리가 있다.

사상에서야 조소앙의 삼균주의도 빠트릴 수 없지만, 현실정치에서 돋보이는 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토지개혁이다. 탈식민의 세계사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작 남한의 토지개혁은 이승만이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과 좌파 농경제학자 강정택을 중용한 덕분이다.

이는 비단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만은 아니다. ‘극단의 시대’인 20세기를 거치면서 서구의 보수주의 정당 대다수는 19세기의 노동운동이 요구한 사회적 생존권을 정당의 강령적 차원에서 수용했다. 20세기 후반 번영을 누린 서구 복지국가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2.0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1970~80년대 공산주의 폴란드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던 아담 미흐닉은 자신들의 반공 저항 운동에는 자유만 있고 민주주의가 없었다고 뼈아프게 회고했다. 민주가 없는 자유는 자유가 없는 민주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21세기의 지구화가 가져온 초국가적 조건은 ‘비국민’ 소수자의 자유와 평등, 생존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3.0 버전을 요구한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가 3.0 버전은커녕 지금처럼 좌우가 번갈아 19세기 자유주의나 20세기 파시즘 또는 공산주의의 1.0 버전으로 후퇴한다면, 자유도 민주도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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