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도한 R&D 예산 들어내기…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2023. 8. 2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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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내년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13.9% 줄이기로 결정했다. 총액은 21조5000억원으로 2019년 수준이다. 주요 R&D 예산이 줄어든 것이 8년 만이다 보니 과학계의 불만이 상당하다. 과학 기술 발전이 중요하다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줘도 모자랄 시기에 연구비를 삭감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 입장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번 예산 삭감이 과학계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줄어든 예산을 잘 들여다보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난 2019년부터 올해까지 4년 만에 R&D 예산은 10조 가까이 늘었다. 이 기간 특히 코로나 펜데믹과 관련된 분야, 소재·부품·장비 산업 관련 예산, 기업 지원 등이 급증했다. 내년도 감액 예산 3조4000억원 중 이런 문제 예산이 거의 2조에 가깝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위험 등급이 독감 바이러스와 같은 4급 감염병으로 낮아지는 시기에 관련 예산을 손볼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집중 투자로 이미 완료된 사업이 많은 소부장 관련 예산도 마찬가지다. R&D라는 탈을 쓰고 예산을 받아가며 결과물은 내지 않았던 사업은 또 얼마나 많았나.

온정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성과 평가의 문제점, 특정 대학·학과가 연구 과제를 독점하는 사례 등은 그간 과학계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던 부분이다. 선진국처럼 실패에 관용적인 투자,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이어지는 투자가 있으려면 그만큼 정확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 또한 모두 알고 있다. 변화가 필요함에도 아무도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은 우리 과학계가 ‘빠른 추격자’로서 선진국의 과학 기술을 따라잡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많은 예산을 투입해 결과를 빨리 내야 하는 과거의 양적 성장 방식이 쌓이다 보니 예산의 비효율적 집행이라는 원치 않는 부산물이 누적된 것이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이루며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근간에는 과학기술이 있다. 기술개발의 기반이 부족했던 1960~70년대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통해 각 산업의 부족한 연구개발 역량을 채웠고, 1980년대 들어 기업의 규모와 연구개발 역량이 확대되면서부터는 민간 중심의 연구개발을 통해 선도국 기술을 목표로 기술개발을 추진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기업의 자발적인 연구개발 투자 유인을 위한 정부 정책이 추진되었고 이에 힘입어 민간의 연구개발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이제 몇몇 산업 분야는 모방할 선도 국가가 없는, 선두 경쟁에서 우위를 다투는 정도가 되었다.

이제 여기저기 구멍 난 R&D 예산 그릇을 탄탄하게 손봐야 할 때이다. 그릇이 구멍 난 채라면 아무리 많은 물을 쏟아부어도 다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릇을 고치기 위해 잠시 물이 끊어지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이번 정부의 R&D 예산 개정안과 제도 혁신 방안으로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당초 마련되어 있던 안을 두 달 만에 갑작스럽게 수정한 점, 과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이 특히 아쉽다. 갑작스럽게 변화가 닥친 만큼 현장의 혼란도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제시된 혁신안을 바탕으로 문제들을 조금씩이라도 손본다면 한국 과학기술은 새로운 도약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렵사리 도달한 선진국 지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과학기술에서 ‘선도자(퍼스트 무버)’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하려면 정부 연구개발의 방향성, 투자, 제도 등 모든 부분에 변화와 쇄신이 요구된다. 오랜 시간 동안 고착화되어 변화와 쇄신을 가로막는 기존의 관행은 다소 어려움을 감내하고서라도 ‘거기지엽(去其枝葉)’, 엉켜 있는 일들의 발단이 되는 부분을 찾아 제거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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