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피아노와 콩나물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우물이 있는 마당, 안채와 아래채가 있는 기와집에는 열 명이라는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다. 나는 맏이도, 막내도 아닌 중간이었다. 엄마는 종종 내 이름을 까먹기도 했다. 둘러앉은 밥상에 내가 없어도 모를 정도였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내가 피아노를 사 달라고 졸랐을 때 웬일인지 엄마는 흔쾌히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피아노를 준다며 나를 불렀다. 엄마가 준비한 피아노는 건반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꾹꾹 누르는 연습을 해라. 손가락에 힘이 붙고, 눈을 감고도 칠 수 있으면 피아노를 사 줄게’.
나는 엄마 말을 믿고 종이 건반을 꾹꾹 누르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반복했다. 내 옆에서 엄마는 달력 한 장을 떼어내 뒷면에 그림을 그렸다. 콩나물을 세워 놓은 것 같은 그림이었다. 맨 앞의 동그라미는 콩나물 머리를 똑 떼 놓은 것 같았다. 콩나물 꼬리가 하나 나온 거, 두 개 나온 거, 세 개 나온 거, 새가 날아가는 모양, 길쭉한 달팽이 모양, 재밌는 그림이었다. 밥풀로 그림을 벽에 붙이고 내게 외우라고 했다. 파리채 끝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높은음자리, 쉼표, 4분음표, 온음표 등은 아무리 봐도 헷갈렸다.
다음 해 나는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날 음악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이 물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이 뭔지 아는 사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어깨를 펴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콩나물 대가리입니다’.
선생님 입에서 풋 하는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은 한참을 웃으시고는 알려주었다. ‘음표라고 한단다. 음표는 온음표. 2분음표, 4분음표, 8분음표, 16분음표…’.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던 ‘콩나물 대가리’가 ‘음표’라 부르는 음악 기호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분명 ‘콩나물 대가리’라고 불렀다. 엄마의 조기 교육은 음표 이외에도 조선왕조 계보 순서 외우기, 사육신과 생육신 이름 외우기에 태양계 순서까지 외워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종이 피아노를 눌러야 했다. 종이 피아노가 너덜너덜해질 때쯤 우리 집에는 진짜 피아노가 생겼다. 의자보다 높이가 낮은 작은 피아노는 건반이 24개 정도였다. 피아노 주인은 내가 아니고 큰언니였다. 나는 언니가 없을 때면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꾹꾹 눌렀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어떤 놀이보다 피아노 치기가 재밌었다. 칠 수 있는 곡이란 학교에서 배운 ‘학교 종’과‘나비야’가 전부였지만 한동안 피아노에 푹 빠져 지냈다.
몇 해가 지나고 고장 난 피아노는 고물상 수레에 실려 갔다. 그 후로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고, 나는 여전히 피아노와는 먼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나는 엄마로부터 통합교육을 받은 건 아닐까? 콩나물과 피아노를 결합해서 상상력을 키워준 거잖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때때로 피아노곡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고 탁자를 꾹꾹 누르고 있다.
여름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안동 과수원에 연락해 청사과 한 상자를 엄마 집으로 보냈다. “굵은 사과가 왔다. 돈 많이 준 거 아니냐. 비쌀 텐데 뭣 하러 한 상자나 샀느냐”며 타박하는 엄마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제 다리 힘이 떨어져 외출하기도 힘들다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종종 엄마의 스무 살과 서른 살, 마흔 살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책 한 권 없던 시골 농가에서 그림으로 콩나물 대가리(음표)를 외우라고 했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다. ‘엄마, 사과는 하루 하나만 드시고 밥을 챙겨 먹어야 해. 덥다고 누워만 있지 말고…’.
내 말이 길어지자 엄마는 ‘잘 먹을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귀엽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