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군경 보는 앞 조선인 학살 장면, 14m 두루마리 그림에 생생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그림… 100년만에 日서 공개
‘조선인이 방화’ ‘조선인 폭동 경계’… 당시 日정부-언론이 유언비어 유포
“日정부, 조사-책임있는 조치 해야”
아라이 가쓰히로(新井勝紘) 고려박물관장(전 센슈대 역사학 교수)은 인터넷 경매로 2년 전 이 그림을 입수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군인, 경찰, 일반 시민이 공공연히 보는 앞에서 조선인을 죽이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했다. 지진 대비를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살던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손에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한일 양국이 진정한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려면 간토대지진의 역사적 진실을 일본이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우물에 독 풀었다’며 무차별 학살
일제강점기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요코하마 등 일본 수도권 일대에 최대 규모 8.3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다음 날까지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이어지면서 일본 정부 공식 기록으로 10만538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수십만 명이 다쳤다.
큰 피해로 극심한 혼란이 이어지면서 유언비어가 퍼졌다. 지진 당일인 1일에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방화가 많다”, 다음 날에는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의 습격이 있다”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일본 내무상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는 ‘도쿄 부근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경계 통지를 주요 기관에 내렸다.
앞서 지진 4년 전인 1919년 3·1운동으로 한반도에 두려움과 불쾌감을 느꼈던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해 무자비한 학살을 조장했다. 조선인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주고엔 고주센(15엔 50전)”을 시켜 어눌하면 바로 살해하는 식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지방 출신 일본인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지진 직후 일본 언론에는 “조선인이 곳곳에서 난도질” “조선 독립 음모단이 광산에서 폭탄 절도” 등의 기사가 담겼다. 지진 발생 한 달이 지난 10월 중순에야 유언비어 때문에 무고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 日정부 “기록 없다” 책임 회피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로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올 6월 일본 참의원에서 야당 사민당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대표는 질의를 통해 당시 일본 정부가 각 지방에 보낸 전보 등을 제시하며 일본 정부가 스스로 유언비어를 조장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본 경찰청 측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며 그동안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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