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핑과 K팝 팬의 ‘명품 언박싱’…샤넬·디올·셀린느·생로랑 낙제점
프랑스 남부 도시 마르세유 근처에 사는 쿠사르가 케이(K)팝 걸그룹 블랙핑크를 처음 접한 건 13살 때인 2016년 유튜브 추천 영상에 뜬 <불장난> 뮤직비디오에서다. “너무 예쁘고 재능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정도 반복해서 보고 지나갔다. “당시엔 아리아나 그란데와 셀레나 고메즈에 더 빠져 있었죠.” 그가 ‘블링크’(블랙핑크 팬을 일컫는 말)가 된 건 2019년 케이팝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2016년의 그날을 재발견하면서다. 그는 블랙핑크의 모든 뮤직비디오와 공연을 다 찾아보고 열렬한 팬이 됐다. 2022년 12월 파리 아코르 아레나에서 열린 콘서트, 2023년 7월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콘서트를 모두 ‘직관’(직접 관람)했다.
‘케이워싱’, 명품 기업의 케이팝 스타 발탁
쿠사르가 블랙핑크를 “정말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으로 꼽는 기억 가운데 하나는, 블랙핑크가 2020년 말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전세계 팬들을 향해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냈던 때다. 블랙핑크는 2021년 영국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6) 및 지속가능발전목표(SDG)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프랑스 팬들도 블랙핑크의 환경 관련 활동을 매우 자랑스러워해요. 로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산불 등) 기후재난 이야기를 소셜미디어로 하기도 해서 이런 활동이 일리 있어 보이기도 했고요.” 블랙핑크는 2021년 9월부터 케이팝 가수는 물론 전세계 모든 가수를 통틀어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 수(2023년 8월 기준 9080만 명)를 기록하고 있다.
케이팝 팬들이 모인 기후행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이 최근 명품 패션 기업들을 상대로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을 비판하고 나선 이유는 바로 이런 블랙핑크의 영향력과 상징성을 기업들이 명품 마케팅에 활용해서다. 케이팝포플래닛은 명품 기업들이 블랙핑크 같은 케이팝 스타를 이른바 ‘글로벌 앰배서더(홍보대사)’로 발탁하는 행위를 ‘케이워싱’(K-Washing, 그린워싱에 한국을 뜻하는 케이를 더한 말)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앰배서더는 광고 계약의 일종인데, 계약자가 자기 소셜미디어에 일상에서 해당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등 광고 모델보다 더 폭넓은 형태로 브랜드를 홍보해준다. 블랙핑크는 걸그룹 최초로 멤버 4명 전원이 서로 다른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발탁돼 ‘명품돌’(명품+아이돌)로 화제를 모았다. ‘인간 샤넬’(제니), ‘인간 셀린느’(리사) ‘인간 디올’(지수), ‘인간 생로랑’(로제)이란 수식어가 각종 연예기사 제목에 쓰일 정도다.
앰배서더의 화제성은 기업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주로 소셜미디어에 능한 엠제트(MZ)세대를 공략해서다. 디올은 2021년 지수를 앰배서더로 발탁한 뒤 2020년보다 MZ세대 매출이 400% 이상 늘었다. 한 데이터분석회사는 제니가 202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에 참석해서 창출한 ‘미디어 영향 가치’(MIV, 유명인이 소셜미디어 등 미디어로 대중에게 도달한 정도를 금전 가치로 환산한 지표)를 360만달러로 추산하기도 했다.
가격대 높으니 지속가능성 크다?
케이팝포플래닛과 국제환경단체 ‘액션스픽스라우더’(Action Speaks Louder)는 “명품 브랜드들이 블랙핑크처럼 기후행동의 대명사로 알려진 케이팝 스타를 홍보대사로 활용할 경우 기업에 높은 지속가능성 수준을 기대하는 젊은 세대 고객층을 공략하는 데 강력한 조합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또한 패스트패션 업계의 경우 이미 기후위기를 가속시키는 ‘기후 악당’으로 알려져 변화를 요구받는 데 견줘 명품 브랜드는 ‘가격대가 높은 만큼 지속가능성이 클 것’이란 암묵적 가정 아래 사회적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겼다.
앞서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기업들은 이에스지(ESG, 환경과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를 중시) 경영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약속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업들이 정말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목표를 잘 세워서 제대로 지키고 있을까? 두 단체는 블랙핑크가 앰버서더로 활약한 브랜드를 소유한 기업 샤넬, LVMH(모에 에네시 루이 뷔통 , 디올과 셀린느의 모기업), 케어링(생로랑 모기업) 3곳의 기후위기 대응 평가를 담은 ‘명품 언박싱: 그린워싱 에디션―명품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보고서를 2023년 8월9일 발표했다. 평가는 각 기업이 누리집, 탄소공개프로젝트(CDP) 등으로 대중에 공개한 기후 관련 약속과 데이터에 기반했다.
평가 결과를 종합하면, 모든 기업이 2020년 대비 2021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증가하고 탄소감축 목표가 모호·불충분하다는 등의 이유로 ‘낙제점’을 받았다. 가장 저조한 성적인 F를 받은 샤넬은 2025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패션 산업에서 가장 탄소 배출이 많은 공급망(원료·직조·편직·염색·재단·봉제 등)이 아닌 자체 운영(매장·사무실·창고 운영 등)에만 국한됐다.
E등급을 받은 LVMH 또한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겠다는 목표 없이 자사 운영에 대해서만 100% 재생에너지를 쓰겠다고 했다. LVMH의 2021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인구 2550만 명가량의 국가 마다가스카르 전체가 배출한 양보다 많은 608만3931 톤(이산화탄소 환산 기준)에 달했다.
3개 기업 가운데는 가장 높은 D등급을 받은 케어링은 2030년까지 공급망을 포함해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보고서는 케어링이 약속한 ‘스코프3’(기업 가치사슬 전반에 걸친 탄소 발생 포괄) 배출량 감축 목표가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1.5도 아래로 제한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감축 목표를 한층 ‘야심차게’ 설정하시길
보고서를 낸 케이팝포플래닛과 액션스픽스라우더는 분석 결과와 관련해 “각 기업이 전체 그룹 차원에서만 데이터를 공개하기에, 평가 결과는 모기업에 대한 지표일 뿐 특정 브랜드에 대한 세세한 등급은 아님을 밝힌다”고 덧붙였다. 샤넬 쪽은 <한겨레21>에 “해당 보고서의 평가 방법은 외부에 공개된 정보만을 다뤘기 때문에 샤넬의 공급망을 비롯해 비즈니스 전반은 물론 그 이상으로 펼쳐지는 당사의 지속가능한 노력의 규모를 반영하지 않았다. 기후 전략인 ‘샤넬 미션 1.5도’는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샤넬은 또한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노력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새로운 자원과 역량에 투자할 계획”이라며 “당사가 자체 진행하는 정기적인 엄격한 평가는 비즈니스 운영은 물론이고 보다 넓은 가치 사슬의 영역에서 상당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케이팝포플래닛과 액션스픽스라우더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명품 기업들이 더 적극적인 기후행동에 나서기를 요구하는 캠페인도 시작했다. 두 단체는 기업들에 현재 공급망에서 사용되는 에너지 데이터와 공급업체 재정 지원을 포함한 탈탄소 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를 한층 “야심차게” 설정할 것 등을 권고했다.
이번 캠페인에는 프랑스·멕시코·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인도 등 세계 곳곳의 ‘블링크’들이 힘을 보탰다. 블랙핑크 프랑스 팬베이스(온라인 팬클럽) 운영진인 쿠사르는 캠페인 참여 계기에 대해 “우리 세대와 우리 시대에 지구 환경을 나아지게 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케이팝포플래닛의 제안을 받고 곧바로 동참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다연 케이팝포플래닛 캠페이너는 “패션업계와 케이팝 팬들에게 캠페인이 충분히 닿을 수 있도록 패션위크 등 다양한 기회를 활용할 계획”이라며, “추후 (케이팝 팬들의) 충분한 청원이 모이면 이런 목소리를 해당 브랜드에 직접 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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