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펼쳐진 폭염 지옥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10년, 20년이 지나면 올해 폭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2023년의 폭염을 10대 청소년들이 더위를 먹고 쓰러지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행사 훈련은 6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새벽 5시 기상 고함에 저학년은 벌떡 일어나 합격을 받을 때까지 기숙사 내외부 청소를 했고, 오전 7∼8시 아침 식사가 끝나면 김일성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10만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가로세로 약 70㎝ 사각형 모서리마다 75-130, 156-30 하는 식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각자에게 점 하나씩 배당됐다. 석 달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훈련은 매우 간단했다. 광장 주석단 지붕 가운데와 양 끝에 세 명의 신호수가 올라가 있었다. 이들이 동시에 1부터 8까지 적힌 커다란 숫자판을 들면 우리는 3가지 종류의 꽃다발을 신호가 내려질 때까지 쳐들고 있어야 했다. 가령 1번이 올라가면 빨간색 꽃다발을 들고, 2번은 노란색 꽃다발, 3번은 둘 다 같이, 5번은 빨간색을 열심히 흔드는 식이다. 자신이 속한 점에 따라 번호별로 다른 색 꽃다발을 들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광장에 ‘김정은 장군 만세’ ‘경축’ ‘일심단결’ 따위의 글씨가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머리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사람이 고작 8가지 동작을 익히는 데 드는 시간은 반나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단순한 동작을 3개월 동안 하루 종일 되풀이시켰다.
대리석인 김일성광장 바닥은 한낮이면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힌다. 그늘도 없고, 물도 없는 그곳에서 우린 영락없는 불판 위 생고기 신세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졌지만, 주변 백화점 건물이나 지하차도로 데리고 가 그늘 아래 눕혀 놓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치유가 불가하면 그 점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살이 익어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쓰렸다. 그러나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평양 시민 10만 명이 독재자를 위한 하나의 점으로 3개월을 존재해야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사람들의 얼굴은 아프리카 흑인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나는 더 빠질 것도 없던 몸무게가 10㎏이나 줄어들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이 됐다.
무더운 여름은 그해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엔 김일성 사망으로 다시 광장에 내몰렸고, 그 이듬해엔 깃발 행진대에 뽑혀 4m 길이의 나무봉을 들고 하루 종일 행진 연습을 했다. 그럼에도 첫 고통이었던 1993년이 제일 힘들었다.
나의 이 이야기는 30년 전의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다. 이후 30년 동안 누군가 대물림해 겪은 일이자, 현재도 벌어지는 일이다. 올해 북한은 9월 9일 정권 수립 75주년에 민간 무력 열병식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해에 열병식을 3번이나 치르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고통의 강도는 폭염처럼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오늘도 달아오른 대리석 위에서 꽃다발을 올리고 내리는 단순 동작을 저녁까지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216m를 정확히 1분 40초에 통과하기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행진 연습을 하는 수만 명이 있다.
평양 시민들이 어려서부터 집단체조, 열병식, 대규모 공사 등으로 쉴 새 없이 내몰리는 것은 단순히 일사불란함의 전체주의를 세상에 과시하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목적은 이들을 앉으라면 앉고, 기라면 기는 파블로프의 개로 사육하기 위해서이며 불평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는 게 어려워질수록 채찍의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이다.
잼버리 참가자들이 겪은 고통에 분노한 사람들이라면, 멀지 않은 평양의 폭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한 번쯤 상상해 보길 바란다. 동족이 지옥에서 헐떡이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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