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노레이블스’의 상식과 한계

박영준 2023. 8. 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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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서 거대 양당에 맞서
상식적인 ‘제3후보’ 주장 눈길
이상적 구호 정치적 한계에도
기성정치 지친 유권자들은 솔깃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그를 당의 대선 후보로 지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202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첫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토론회가 열린 23일(현지시간)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토론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순간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자격 미달’ 후보들에게 괴롭힘당할 이유가 없다며 토론회에 불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존재감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박영준 워싱턴 특파원
사회자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기업가 출신의 비벡 라마스와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도미노처럼 전체 8명 후보자 중 7명이 손을 들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다른 후보들의 눈치를 본 뒤에 다섯 번째로 손을 들었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마이크 펜스는 여섯 번째였다. 후보들이 손을 들 때 토론회장에 모인 공화당 지지층의 박수가 쏟아졌다.

최근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라마스와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21세기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사면하겠다고도 했다.

4번의 검찰 기소로 91개 범죄 혐의를 받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토론회 시간에 맞춰 사전에 녹화한 단독 인터뷰 영상을 공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2020년 대선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출신으로 한국계 아내를 둬 ‘한국 사위’로도 잘 알려진 래리 호건 전 메릴랜드 주지사는 토론에서 대다수 후보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지지할 수 있다고 손을 든 순간을 떠올리며 “부끄럽고 역겨웠다”고 말했다.

호건 전 주지사는 내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닌 제3의 후보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도 성향 정치단체 ‘노레이블스(No Labels)’의 공동 의장을 맡고 있다. 호건 전 주지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전·현직 대통령 간 대결이 또다시 성사될 가능성이 커지면 노레이블스가 대안 후보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그는 민주당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조 맨친 상원의원과 함께 제3의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물론 낮은 인지도는 걸림돌이다.

노레이블스는 창립자인 민주당의 조 리버먼 전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호건 전 주지사, 공화당 팻 매크로리 전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등이 합류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이들은 민주당, 공화당이라는 딱지(Labels)를 달고 극한으로 대립하는 기존 정당이 아니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제3의 후보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레이블스의 한계는 분명하다. 제3의 후보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제3의 후보가 선거에 출마해 중도성향 지지층의 표를 얻으며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지만, 그 이상의 성취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다수다. 공화당 소속 호건 전 주지사나 민주당 소속 맨친 의원이 ‘제 살 깎아 먹기’식으로 제3의 후보로 출마하거나, 새로운 후보를 내세우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작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레이블스의 구호가 이상적이거나 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노레이블스는 ‘상식’이라는 제목의 72쪽 분량의 정책 자료집에서 ‘상식적 의제’ 30개를 제시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은 여성의 생식 보건 의료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인간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총기 문제에 대해서는 ‘헌법상 총기를 소유할 권리가 있지만, 사회는 위험한 무기를 사람들로부터 멀리해야 할 책임도 있다’는 식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판에서 대안 없이 입바른 소리만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선택지가 없는 정치에 새로운 선택지가 되겠다는 노레이블스의 도전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양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거대 정당에 맞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꿈틀거리고 있는 한국의 제3 지대 정당도 처지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영준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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