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로 돌아간 듯… 태피스트리가 펼치는 환영의 세계[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첫 번째 방법. 적절한 스킨십을 시도하라. 촉각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가능한 경험이기에 그만큼 내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도 촉각은 맨 마지막에 허용되는 영역이 아니던가. 보고 듣는 관계를 넘어야 간신히 만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때가 무르익고 상황이 적절할 때 스킨십은 관계를 고양한다. 바로 그래서 유세에 나선 정치인들이 최대한 많은 유권자와 악수를 하려 든다. 촉각에 호소하여 관계를 고양하고 싶은 것이다. 살을 맞댄 사람들은 그 접촉의 경험을 오래오래 잊지 못한다.
두 번째 방법. 당신의 공간으로 초대하라. 당신은 이 차갑고 광활한 우주에 한 점 먼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당신의 공간을 가꾸어왔다. 그것이 작은 기숙사 방이건, 자주 눕는 벤치이건, 넓은 저택이건 간에.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는 당신의 손때 묻은 공간이 있다. 몰개성을 추구하는 집단거주지에도 누가 살기 시작하면 거기에 개성이 깃드는 법. 특정 공간에는 싫든 좋든 사용자의 개성이 깃든다. 어떤 그림을 걸어 놓을 것인가. 어떤 깔개를 놓을 것인가. 어떤 식물을 기를 것인가. 어떤 책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나의 작은 굿즈들은 어디에? 공간은 그곳에 처하는 이가 물질화된 결과다.
표정, 말,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자신이 사는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대부분을 보여주겠다는 큰 결단이다. 자신의 공간이 너무 좁고 누추하다고 여겨질 때 초대가 망설여진다. 그 역시 그 공간이 곧 자신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집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관계의 고양을 경험할 것이고, 그와 같은 초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꽃다발을 살 것이다. 자, 이제 좀 더 진전된 관계가 시작된다.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는, 손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은 제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이 세계는 여느 세계와는 좀 다를 거예요.” 나는 그러한 야심을 다름 아닌 태피스트리(실로 짠 그림)가 가득 찬 귀족의 거실에서 보았다.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답사해 보면 방이나 커다란 연회장을 온통 태피스트리로 장식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림의 중요성이 날로 커져가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도 태피스트리에 대한 선호는 결코 줄지 않았다. 오히려 태피스트리는 그림보다 더 호화롭고 호사스러운 예술품 취급을 받곤 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태피스트리로 자신의 방을 치장하고 싶어 했을까.
태피스트리는 추울 때 보온의 기능도 하고, 전염병이 유행하던 때 차단의 기능도 했다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의 태피스트리 선호는 그보다 더 큰 야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호화로운 태피스트리를 소유한 권력자는 손님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싶다. 당신은 이제 차원이 다른 곳에 왔습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내 공간에 들어온 당신은 이제 세상을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마치 세례의 경험처럼, 이 방문을 통해 당신의 감각은 일신될 것입니다!
세례의 예식을 집전하는 것은 이제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그 느낌은 물이 주는 놀라운 촉각적 경험 때문에 가능하다. 단지 보고 듣는 일을 넘어 물이라는 액체 속에 완전히 잠기는 경험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일신되는 체험을 한다. 잠수나 수영은 물론이고 더운 날 탁족(濯足)마저도 잠시 다른 공간에 다녀오는 각별한 체험을 선사한다. 태피스트리는 바로 그러한 촉감을 시각화한 매체다. 직물이라는 특유의 소재로 인해 태피스트리를 보는 사람들은 만지지 않았어도 마치 무엇인가 만진 듯한 느낌, 닿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기에 여느 그림과는 달리 태피스트리는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고, 그 경험이 만드는 분위기에 손님 마음은 흠뻑 젖게 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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