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노] ‘사순이’와 ‘바람이’의 비극… 법의 사각지대가 만들었다

허시언 기자 2023. 8. 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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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탈출한 암사자 사살로 마무리
'갈비뼈 사자'로 동물사육환경 논란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비극 일어나

“평생을 비좁은 철창 안에서 살았어요. 드넓은 초원 위를 달리고 싶었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살 수밖에 없었죠. 사방이 콘크리트와 인공적인 구조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난 아주 무력했어요. 흙바닥을 밟고, 산들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온갖 냄새를 맡으며, 아주아주 넓은 대지를 뛰어다니고 싶어요. 숨을 헐떡이며 사냥도 하고, 흐르는 물을 마시며 해갈하는 평범한 삶을 원해요. 다른 동료들은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난 왜 아무것도 누릴 수 없나요? 이 훼손된 공간 안에서, 난 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이번 주 와이라노는 야생동물이 살아가기 부적합한 공간에 갇혀 지내야 했던 동물의 목소리를 먼저 들려 드리면서 시작했어요. 최근 개인 사육장과 민간 동물원에서 양육되던 사자 두 마리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요. 두 마리 모두 야생동물을 키우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공간에서 사육되고 있었어요.

지난 14일 오전 경북 고령군 덕곡면 한 목장에서 탈출한 암사자가 산으로 달아나다 엽사에게 사살됐다. 연합뉴스


지난 14일 경북 고령의 한 사설 농장에서 암사자 ‘사순이’가 탈출했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현장으로 출동해 수색에 나섰고 약 20분 후 농장에서 20m 떨어진 숲에서 사순이를 발견했어요. 사순이는 숲속 그늘에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죠. 그러나 경찰과 소방당국은 인명피해가 우려된다며 사살을 결정, 동행한 엽사가 엽총을 발포했습니다. 새끼 때부터 농장에서 20년가량 살았던 사순이는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은지 한 시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순이와 같은 사자는 현재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부속서 Ⅱ급에 속하는 종입니다. 현행법상 개인이 사자를 사육하는 것은 불가능한데요. 그런데 개인이 어떻게 야생동물을 키울 수 있었나 싶으실 텐데요. 사자 등 야생동물을 관리하는 법령인 ‘야생동식물보호법(현행 야생생물법)’은 2005년에 제정됐습니다. 20살이 넘는 사순이는 2005년 이전에 국내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현행법의 소급적용을 받지 않아 지금껏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물자유연대 정진아 팀장은 “관리 감독에 소홀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이 키우는 모든 야생동물을 규제하고 동물 전시시설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 정 팀장은 “개인이 사육하는 사자는 사순이가 마지막으로 파악됐다”며 “개인이 키우고 있는 야생동물을 전수조사하고 규모를 파악해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청주동물원 직원들이 ‘바람이’를 이송하려 철제 우리에 넣고 냉장탑차에 실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박동필 기자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자는 한 마리가 더 있었습니다. 갈비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공개돼 ‘갈비뼈 사자’라는 별명이 붙여진 사자 ‘바람이’입니다.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해 보이는 바람이의 영상이 공개되면서 바람이를 수용 중인 경남 김해 부경동물원이 동물보호단체 등으로부터 동물을 부실하게 관리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육장의 좁은 면적, 콘크리트 바닥, 감옥형 전시시설 등 동물복지 문제가 계속 제기됐었죠. 지난 7월 바람이는 청주동물원으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코로나19 등으로 자금난을 겪은 부경동물원은 지난 12일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동물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좋은 환경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람이가 살았던 사육장의 환경은 그다지 쾌적해 보이지 않았죠. 부경동물원은 2013년에 문을 연 민간 동물원입니다. 당시에는 동물원·수족관의 허가와 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동물원 및 수족관에 관한 법률’이 없었습니다. 야생동물의 보호·서식 환경 등을 정하는 ‘동물원수족관법’은 2017년에서야 시행됐습니다.

세명대 어경연(동물바이오헬스학과) 교수는 “민간 동물원은 자금도 부족하고 환경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례가 많기 때문에 야생동물을 돌보는 일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해외 동물원에 비해 부족한 점도 많고, 복지나 환경 면에서 뒤쳐져 있다는 것. 어 교수는 “소규모 민간 동물원을 보면 동물들이 안타까운 환경에 처해 있는 때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사순이’가 살았던 우리의 모습. 연합뉴스


두 사자의 비극은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005년 이전부터 사육되던 사순이에게는 법령을 소급 적용할 수 없어 지금껏 정책적 사각지대 속에서 개인의 소유로 합법 사육돼왔죠. 2017년 이전에 지어진 부경동물원은 동물들이 살아갈 서식 환경에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죠.

과거에는 동물을 전시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동물권에 대한 관심도 높지 않았죠. 최근에 들어서 동물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동물이 행복하고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은 점차 동물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있는데요. 오는 12월부터는 개정된 ‘동물원수족관법’과 ‘야생생물법’이 시행될 예정입니다. 등록제로 운영되던 동물원이 허가제로 바뀌게 됐죠.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기존과 달리 개정 이후에는 본래 서식지와 동물 습성을 고려한 환경을 조성한 곳에서만 동물원과 수족관의 운영 허가를 내릴 예정입니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아닌 시설에서 야생동물을 전시하는 행위도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동물원의 동물별 사육기준도 앞으로 정해질 예정이죠.

어 교수는 “개정된 동물원수족관법과 야생생물법이 동물원의 기준을 높여줄 것”이라며 “‘동물원이 이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는 기준이 생기고 거기에 맞춰나가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물원은 아주 많은 자본이 들어야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어 교수는 “국립동물관리공단을 설립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며 “국가 차원에서 동물원에 대한 기준을 끌어올리고, 동물들에게 더 나은 환경과 복지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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