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이해관계
자녀가 결혼할 때 증여세 면세 한도를 5000만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올리는 정책이 추진된다는 뉴스를 읽는다. 내 아이들의 머릿수에 1억5000을 곱해보는 계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섯 집 중 네 집, 자녀 결혼 때 1.5억 증여해줄 여력 된다”는 제목의 기사가 여러 일간지에 등장한다. 통계청의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해석한 것이라는데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문구로 보아 어느 공무원이 만든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실었으리라 짐작한다. 계산인즉슨 25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자녀가 있는 가구의 순자산은 평균 6억5000만원 정도, 그중에서 당장 증여하기 어려운 실물자산(아마도 대부분이 부동산일 것이다)을 뺀 나머지, 즉 돈으로 쉽게 바꿔 증여할 수 있는 금융자산 등이 1억6000만원을 약간 넘는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평균의 함정이 존재하므로 딱히 의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1인당 국민소득을 3만달러로 잡고 어림 계산해도 4인 가구의 평균 재산이 11억원을 넘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면 상위 10% 안에 들고도 남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6월6일자 필자의 칼럼 ‘성장률과 사라져가는 평균’ 참조).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순자산이 1억5000만원 이상인 가구가 전체의 80% 정도 되니 “이론상 결혼적령기의 미혼 자녀가 있는 다섯 가구 중 네 가구는 증여세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산 수준”이라는 어이없는 계산이 뒤따른다. ‘결혼적령기’의 자녀가 오직 한 명뿐이라는 가정, 순자산 1억원대의 가구가 2023년 한국 사회에서 누릴 수 있을 생활수준에 대한 사회과학적 상상력의 결여, 더구나 그 순자산을 자녀에게 모조리 증여해준다는 가정(대체 부모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엉성한 논리에다 심지어 위험한 이데올로기 조작의 혐의까지 지니고 있다.
요컨대 결혼하는 자녀에게 1억5000만원 정도를 증여할 수 있는 가구, 그 면세한도의 인상을 통해 몇 천만원의 세금을 아낄 수 있는 가구가 정책의 직접적 수혜대상이자 아마도 선거에서 ‘우리’를 지지해줄 수 있는 세력이기도 한 것이다. 인식했건 아니건 간에 그 ‘우리’ 안에는 어떻게든 정책효과를 강조해보려고 머리를 쥐어짰을 예의 공무원도, 그 기사를 퍼날랐을 기자들도 속해야 한다. 양가에서 1억5000만원씩 3억원이 초부자냐 아니냐를 두고 공방하는 동안, 추상적 평균에서 멀어진 보통사람들의 삶은 잊힌다. 다름 아닌 그 공방의 주역들, 즉 국회의원들의 2022년 기준 평균 재산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몇 명을 제외하고도) 20억원이 넘는다는 통계는 출산장려정책이 이른바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이 많은 것은 죄가 아니다. 너무 적은 재산이 당사자의 무능력이나 게으름의 결과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다양한 계층의 관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만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
선거결과는 얼핏 생각하듯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바뀌는 것뿐이라는 어느 진보지식인의 지적이 회자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에서도 그 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양극화한 정치지형에서 죽기 살기로 지지하는 ‘우리 편’이 집권한다 한들, 구조 그 자체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1928년 독일노동조합총동맹이 출간한 경제민주주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문건은 국가경제정책기구가 사적 이익이 아닌 보편적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바뀌어야 함을 지적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영향받는 경제정책 결정에 있어 바로 그 다양한 계층의 이해가 대변되고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원칙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것이 비열한 의도를 지닌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물질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구조만을 논하는 것은 현실의 단기적 모순에 눈감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절망적인 현실은 오히려 우리가 구조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탁구공이 테이블 이 편 저편을 어지러이 넘나드는 순간에도 경기의 규칙은 그대로 유지될 뿐이라는 인식, 그러므로 우리는 규칙을 설정하는 이들에 맞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 힘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동시에 어이없는 논리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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