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유산
고마운 분들 덕으로 정성스럽게 지은 작은 흙집. 흙집 방 안에 별을 노래하는 농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손때 묻은 책. 고달픈 농사일에 지쳐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준 작은 구들방. 손님들과 둘러앉아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눈 오래된 밥상과 찻잔.
가을에서 봄까지 전기와 기름 없어도 따뜻하게 잘 수 있게 만든 아궁이와 이웃 마을 청년 농부 구륜이가 준 아궁이 땔감. 앞마당에 옛 주인이 심은 늙은 감나무와 가죽나무. 산골 이웃이 선물로 준 고운 단풍나무. 가까운 텃밭에서 철마다 자라는 부추, 상추, 토마토, 케일, 치커리, 고추, 들깨, 참깨, 취나물, 오이, 가지, 옥수수, 토란, 여주, 땅콩, 감자, 양파, 마늘, 박하, 대파, 쪽파, 무, 배추, 생강, 시금치, 쑥갓….
마당 왼쪽에 보기만 해도 넉넉해지는 장독. 그 안에 든 간장, 된장, 고추장, 매실, 오미자, 솔잎, 산야초 원액. 장독대 앞에 해마다 저절로 피고 지는 노란 수선화,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분꽃, 천리향, 민들레, 괭이밥, 접시꽃….
마당 오른쪽 은행나무 아래엔, 황금보다 귀한 똥오줌을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거름으로 만들어 주는 그윽한 생태 뒷간. 농사일 마치고 아내랑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자갈 마당 흔들의자. 아내와 나를 친자식처럼 여겨 주는 우리 마을 하동 할머니와 같이 돌과 흙으로 만든 무쇠솥 거는 아궁이. 그곳에 넣고 삶아 겨우내 밥상에 오를 무시래기와 묵나물.
산길 옆에 마르지 않고 샘물이 흘러나오는 샘밭. 벗들과 함께 돌을 쌓아 만든 돌담밭. 바로 아래 개울이 흐르는 개울밭. 여러 식구들 먹여 살린 향긋한 박하밭. 창고 안에 해보다 먼저 일어나 묵묵히 함께 일해 준 닳고 닳은 호미와 괭이와 낫과 손수레와 삼태기. 마을 설매실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선물로 만들어 주신 지게.
낮은 언덕배기에 심은 아내가 좋아하는 엄나무와 뽕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배롱나무, 앵두나무, 매실나무, 석류나무, 살구나무, 두릅나무, 돌배나무. 밭가에 유정란을 생산하는 농부님이 준 닭 거름과 흙살림에서 가져온 유기농 거름.
늘 그 자리에서 마을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뒷산 소나무. 들머리에서 마을을 품고 있는 큰 느티나무. 힘들고 돈벌이도 안 되지만 그래도 묵힐 수 없는 산골 다랑논과 비탈진 산밭. 마을 사람들이 한 해 내내 먹고도 남을 도토리를 육각정 둘레에 그저 떨어뜨려 주는 참나무. 그 아래 쉼 없이 흐르는 맑은 개울물. 개울물 속에 노니는 물고기들. 가끔 도시에서 찾아오는 아이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추잠자리와 노랑나비와 여치와 메뚜기와 뭉게구름과 새들과 개똥벌레와 달과 별. 아침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안부를 묻는 텃새와 철마다 피고 지는 들꽃과 은은한 풀벌레 소리와 산길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강아지와 고양이 그리고 너구리와 오소리와 고라니.
그 무엇보다 가난과 자연을 벗 삼아 온갖 기쁨과 희망, 때론 고단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산골 이웃들. 그 이웃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열매지기공동체 젊은 농부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청년들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담쟁이인문학교 사람들. 이 시대 희망인 청년 농부 구륜, 수연, 예슬 그리고 자연을 품에 안고 사는 민호, 기범, 경락, 재훈, 심정, 창희, 상우, 준하, 유비, 희준, 예림, 이랑, 효준….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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